북한 영변의 핵시설 위성사진

이란 핵 시설 폭격에 즈음해서 1994년 북핵 위기 당시에 대한 두 전직 대통령 클린턴과 김영삼의 증언이 인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두 전직 대통령은 당시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폭격했더라면 전면전을 유발해서 미군 5만 명과 한국군 50만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고 전했다. 당시 미 국방장관이던 윌리엄 페리도 그런 내용을 나중에 자신의 책에 남겼다. 전쟁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되면 여러 가지 예측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예측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예측은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1994년 북핵 위기에 앞서 미국이 치른 큰 전쟁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군을 몰아내기 위한 걸프 전쟁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후 부시 대통령은 '사막의 방패' 작전 (Operation Desert Shield)을 전개해서 1990년 8월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해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시켰고, 1991년 1월 17일에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개시해서 2월 28일에 작전을 종료했다. 이렇게 해서 쿠웨이트는 해방됐고 이라크의 군사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 기간 미군 인명 피해는 전사자 147~148명, 비전투 사망자 145~146명이었다. 이런 대규모의 전쟁으로선 미군의 인명 피해가 놀라울 만큼 적었다.

그러면 미 국방부는 처음부터 이런 성공을 예상했는가? 부시 대통령이 걸프 지역에 군을 배치하기 시작할 무렵인 1990년 9월,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지(誌)는 국방부와 국가안보회의는 쿠웨이트를 해방하기 위한 작전에는 미군 전사상자(戰死傷者)가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는 기사를 내 보냈다. 국방부는 이 기사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기 때문에 실제로 모델을 이용한 워 게임을 해서 그런 예측을 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이라크가 만일에 사우디를 점령하면 사우디 탈환에는 미군 전사상자가 40,0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음도 나중에 확인됐다.

8월 2일 사담 후세인의 군대는 쿠웨이트를 침공해서 쉽게 장악했다.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하려는 동향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이라크 주재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April Glaspie 1942~)는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며칠 전에 후세인을 만나서 미국은 아랍국가 간의 문제에 간여하지 않을 것 같은 잘못된 메시지를 주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CIA도 이런 상황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헬렌 토머스 기자의 질문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개입을 논의하고 있지 않다”고 답해서 기사가 크게 났다. 이런 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드린 사람은 브렌트 스코크로프드 안보보좌관이었다. 긴급하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 해외 출장 중인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을 대신해서 참석한 로렌스 이글버거 국무차관이 이 사안은 냉전 이후 체제의 최초의 테스트가 될 것이라고 군사개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콜린 파월 합참의장은 신중론을 제시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군 상층부에선 사우디라면 몰라도 쿠웨이트 때문에 전쟁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콜린 파월은 중부군사령관한테 쿠웨이트 때문에 미국이 전쟁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던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돈만 밝히는 부자나라 쿠웨이트는 미국과 서유럽은 물론이고 다른 아랍국가 사이에서도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참모들의 의견을 들은 부시 대통령은 상황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결심을 했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자들의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This will not stand"(이건 용납할 수 없어)라고 말해서 언론에 크게 났다. 백악관에는 안보회의 멤버를 중심으로 태스크 포스가 꾸려졌고, 부시 대통령은 회의 참석자들의 견해를 경청했다. 그러던 중 공군참모총장이 워싱턴포스트 기자한테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을 패퇴시키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은 공군력이라고 말한 것이 보도가 됐다. 화가 난 스코크로프트는 부시 대통령에게 그를 해임하라고 했고 다음날 부시는 그를 해임했다.

합참은 전쟁 계획을 짜서 안보회의에 보고했는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쿠웨이트를 장악한 이라크 군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스코크로프트는 이는 전쟁을 하기 싫다는 것과 같다면서 부시에게 거부하라고 권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해병대 병력을 걸프 쪽에 배치해서 동쪽을 치는 것처럼 이라크 군을 유인하고 미군 주력부대는 서쪽으로 쳐들어가서 이라크 군을 포위하는 작전 계획이 세워졌다. 말하자면 ‘성동격서(聲東擊西)’였다.

‘사막의 폭풍’ 작전은 이라크 전쟁 지휘부와 방공(防空) 체제에 대한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과 ‘틴(teen) 시리즈’로 불리는 F-14, F-15, F-16, F-18 전폭기 공습을 시작으로 지상군이 폭풍처럼 밀고 들어가서 100시간 만에 실질적인 전투를 끝내는 빛나는 성공을 이루었다. 상황에 대한 브리핑은 딕 체니 국방장관, 콜린 파월 합참의장 그리고 아널드 스워츠코프 중부군 사령관이 해서, 군복을 입은 파월 대장과 스워츠코프 중장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끈 1등 공신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1925~2020) 안보보좌관이었다. 그는 공군 출신으로 헨리 키신저 아래에서 부보좌관을 했고 포드 행정부에서 키신저 후임으로 안보보좌관을 지내면서 당시 CIA 국장이던 조지 H. W. 부시와 깊은 교분을 쌓았다. 컬럼비아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 그는 공군 중장으로 전역했고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자 공직에서 물러났다. 1994년 북핵 위기 때 북한이 비확산조약에 복귀하지 않으면 영변 핵시설을 폭격해야 한다는 칼럼을 낸 바 있는 스코우크로프트는 2003년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하려고 할 때는 반대하는 칼럼을 써서 아버지 부시의 의중을 대변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전사상자가 얼마가 나오느냐 하는 예측을 국방부가 하게 되면 항상 전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항상 많은 군사 자원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오는데, 걸프 전쟁도 그러했다. 이런 예측은 정량분석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정성적(定性的) 요소가 간과되는 경향이 있고 군 자체의 자기 보전 본능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북핵 위기 때 “미군 5만 여명과 한국군 50만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