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2년 발생한 '강릉 차량 급발진 사고' 관련 TV 보도 화면 캡쳐.

2009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경찰관이었던 마크 세일러를 포함한 일가족 4명이 탄 렉서스 ES350 차량이 시속 195km로 급발진, 교차로에 충돌해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 결과 렉서스 RX400h 매트가 액셀러레이터에 껴서 자동차가 운전자의 페달 밟는 행위에 무관하게 가속이 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 토요타 자동차 총 12개 모델에서 같은 결함이 발견돼 리콜에 들어갔다.

2010년에는 토요타 자동차 노화된 액셀러레이터 페달이 밟힌 상태헤서 회복이 안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자동차 이용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토요타 자동차 총 8개 모델에서 이 같은 결함이 발생했다.

토요타는 이 두 결함으로 1000만대 이상을 리콜했으며, 2014년 토요타는 기소유예에 합의하고 12억달러의 벌금에 동의한 바 있지만 전자제어장치(ECU)의 결함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BARR) 그룹의 도요타 급발진 조사보고서로 ECU에 내장된 SW의 오류를 확인하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내면서 결함이 드러나게 됐다. SW 오류는 ECU 내 메모리 영역에서 일어났다. SW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때 특정 메모리 영역을 공유하는데, 이 공유 지점에서 간섭 현상이 일어나면서 급발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미국 정부는 공식 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전자적 결함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사이 도요타의 연구기관에 대한 매수협의 등 무수한 의혹이 있었다.

차량 과속에 따른 사고의 원인으로 급발진을 증명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고, 자동차 회사라는 거대 기업집단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기관이나 국가나 법원 모두 소비자의 손을 들어주기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지난 5월 13일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는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12살 이도현군이 사망한 티볼리 급발진 의심사고 민사소송에 대해 도현 군 가족이 KG모빌리티 상대로 제기한 9억2000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제조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도현 군 할머니가 운전한 티볼리가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인해 급발진이 발생했고 급가속 시 자동 긴급보조시스템(ABS)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도현 군 가족 측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판결 뒤 전국에서는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제조사가 사고 원인을 입증하게 하는 ‘도현이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고, 페달 블랙박스 의무화에 대한 요구도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국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손해배상 소송에서 결함 입증 책임 주체를 '소비자→제조사'로 전환하는 제조물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 이른바 '도현이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상 급발진 소송에서 소비자 측이 승소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자동차 리콜센터가 2010년부터 2024년 3월까지 14년간 접수한 급발진 의심 사고는 791건이지만 이 중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1 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제조물책임법 시행은 2002년 7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정된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결함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 제조자의 고의·과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제조물결함의 존재만 입증하면 쉽게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소비자들의 권리가 살아날 것을 국민 모두는 기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기대에만 그친 셈이 됐다.

말로는 쉬울 것 같은 ‘제조물결함 존재의 입증’의 장벽은 에베레스트산 만큼이나 높아 어느 소비자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조물결함 관련 입증을 제조사인 도요타가 나서서 해도 ‘전자적 결함’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데, 힘없는 소비자가 무슨 힘으로 결함을 밝힐 수 있겠나.

도현이 가족의 사고를 계기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 5건이 발의됐으나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한 채 결국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현재 22대 국회에서도 현재까지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8건이 발의된 상태다.

국내 메이커 외에도 글로벌 자동차들까지 엄청난 힘을 가진 자동차 기업과 단체들의 힘으로 인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제조자가 결함의 원인을 밝히는 제대로 된 제조물책임법은 요원하다는 말이 나온다.

졸속으로 치르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도현이법’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후보는 아무도 없다.

이미 자동차는 기계장치가 아닌 전자장치가 됐다. 복잡한 전자적인 장치를 일개 소비자가 해부해서 원인을 밝혀내라는 것은 어느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제조한 기업과 전문 연구기관이 모두 달려들어도 밝히기 어려운 것을 개인보고 입증하라니. 그런 법은 없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제조물책임법이 소비자에게만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제조자가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확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소비자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제조자들이 지금은 엄청난 힘으로 국회와 법의 견제를 피해 책임에서 벗어나 있지만,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날리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제조자 책임이 있다면 인정하고 소비자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21대 대통령이나 22대 국회에서는 ‘도현이법’이 만들어져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약자인 소비자를 살리고 장기적으로는 제조자인 기업도 살리길 바란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