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능력은 모두 다르게 마련이다. 만약 전임자가 뛰어난 능력자였다면 후임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되도록이면 전임자가 만든 제도와 전통을 지키는 게 좋다. 그게 '전통와 유산'을 중시하는 보수의 가치이다. '내가 잘 났다'며 능력도 안 되는 후임자가 설치면 동티가 난다. 좌파 사회주의들이 그랬다가 나라를 거덜냈다. '능력이 부족하면 가만히라도 있어라'가 진실이다.
요堯 임금이 순舜의 됨됨이를 보고 임금의 자리를 그에게 넘겨준 선양禪讓은 수천 년 동안 칭송되었으며,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사람 포숙鮑叔이 자신에게 돌아올 재상 자리를 유능한 관중管仲에게 양보한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었습니다.
포숙은 젊었을 때 관중과 친하게 사귀었는데, 영상潁上(지금의 안후이성 영현) 사람 관중의 집은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여 항상 관중을 도와주면서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나누었습니다. 포숙은 제나라 양공襄公 때 공자公子 소백小白(훗날의 환공)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자 소백을 따라 거莒로 달아났고, 관중은 공자규公子糾를 따라 노魯나라로 달아났습니다.
양공이 피살되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다투었는데, 관중이 소백의 귀로를 습격하여 소백의 대구帶鉤(허리띠)를 맞추었습니다. 소백이 죽은 척하고는 먼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나라 환공桓公입니다. 환공이 포숙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고 투옥된 관중을 석방해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라고 권했습니다. 환공이 그 말을 따라 관중을 재상에 임명했습니다.
관중은 환공을 잘 보좌하여 개혁정치를 실행했습니다. 정치면에서 그는 전국을 국國, 야野로 나누어 다스리는 삼국오비參國伍鄙 제도, 즉 군주와 두 세경世卿(대대로 경卿의 지위를 계승한 가문)이 나누어 제나라를 관할하게 하고, 나라에 각급 군사조직을 설립하고 사, 농, 공, 상의 각종 직업을 규정했습니다. 경제면에서는 조세개혁을 실행하여 정전井田제도 대신 토지를 한껏 활용하되 세금을 줄이는 정책을 실행하고, 농업과 수공업 발전에 유리한 정책을 함께 실시했습니다. 또한 제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산업을 고려해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제나라의 부를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유능한 사람에게 자리나 일을 양보하는 양현讓賢의 사례를 한漢나라 초기 소하蕭何(?-기원전 193)와 조참曹參(자는 경백敬伯)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조高祖 유방劉邦(재위 기원전 202∼195)의 뒤를 이은 혜제惠帝(기원전 210-188, 유방의 차남, 이름은 유영劉盈)가 즉위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기원전 193년에 상국相國(재상) 소하가 중병에 걸려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소하는 자신의 후임으로 조참을 추천했습니다. 혜제가 자신의 추천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한 소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며 기뻐했습니다. 조참은 소하가 만들어 놓은 법과 규정을 잘 이어받았다. 여기서 ‘소하가 만들고 조참이 지켰다’는 소규조수蕭規曹隨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이 덕에 정권 초기 불안정한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조참이 늘 오전에 집무를 마치고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쉬면서 처첩들과 놀았습니다. 부하들이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내가 소하 대감보다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소하 대감이 정한 제도대로 일을 처리하니 더 할 일이 없더라. 그래서 쉬는 거다. 능력도 모자란 내가 괜히 일을 더 벌일 필요가 없다"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국정이 안정되더라는 거지요.)
소하는 유방의 재상을 지냈으며 한신韓信, 장량, 조참과 함께 한나라의 개국공신입니다. 유방이 진秦나라의 수도 셴양咸陽을 공격했을 때, 소하는 진나라의 문서와 법령 등을 입수하여 그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한나라의 법규와 제도를 제정했습니다.
코라시아,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