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출발점도 다르고, 목적지도 다른 경주이다. 왜 같은 출발선에서 나아가 같은 경로를 거쳐 같은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가?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면서 기회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동일한 출발선에서 모든 사람이 출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유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을 향해 달리는 경주가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며 출발점도 정확하게 다르다.
기회균등주의란 모든 국민에게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여 공평을 기하자는 태도. 교육의 기회균등, 경제적 활동의 기회균등 따위를 이른다. 그렇지만 기회균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며 오류이다. 기회는 원천적으로 균등할 수 없다. (나라, 부모, 지역, 직업 등이 모두 다르다. ) ‘기회 균등’이란 ‘법 앞의 평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저자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정책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데이터가 말해준다. 태어난 나라에 따라 평생 소득의 50% 이상이 결정된다. 부모가 물려준 DNA가 30%, 자라난 환경이 10% 비율로 소득에 영향을 미친다. 입양아와 친자의 소득 추적 통계로 밝혀진 사실이다. 나머지가 살면서 만나는 행운과 불운, 은인과 악연이 크로스되는 거다. 운 좋게 대학에 간 것, 사소한 기적들⋯, 따지고 보면 노력과 집중할 힘조차 유전과 양육 환경에서 나온다. 순수한 내 능력과 노력은 제로에 가깝다....인생 성취의 80%가 운으로 결정된다. 그중 50%가 태어난 국가에 의해 좌우된다. 좋은 국가는 국민소득의 50%를 책임질 수 있다.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고 자녀를 낳아 행복하게 키울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한다. 물론 좋은 뜻을 가졌다고 모든 정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약자를 (진정으로) 돕는 현명한 정책을 내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적 격차가 아니다. (토마 피게티는 불평등 심화만 보여줬을 뿐 소득 향상은 보여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실제 소득이 얼마이고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증가했는가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240여 년 전에 “오늘날의 근면하고 절약하는 농부들이 옛날 유럽의 왕족보다 더 많은 편의를 누린다. 농부들이 누리는 편의는 벌거벗은 야만인 수만 명의 목숨과 자유를 좌지우지 하는 아프리카의 절대적인 왕보다 낫다”라고 썼다.
자본주의는 대체적으로 국민의 복리와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격차를 표시하는 지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빈곤율과 같은 표현도 상대적인 빈곤들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 (상대적 불평등만 보고 과거가 좋았다고 하는 얼치기 좌파들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격차가 아니라 삶의 복리의 개선이다.
개인의 재산은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가 아니다. 평등주의자들은 ‘파이’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이의 소유자가 누구인가이다. 평등주의자들은 소유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분배만 관심을 집중한다. 피게티의 ‘글로벌 누진 과세’나 좌파가 주장하는 ‘부자 증세’는 안구를 재분배하자는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열심히 일한 사람, 절약하는 사람에게 벌을 줘야 하는가?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산다)을 하겠다는 사람과 네돈내산(네 돈으로 내가 산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사람)을 하겠다는 사람 가운데 누가 나쁜 사람인가?)
철학자 노직은 자신의 신체나 생명에 대해 개인이 절대적 권리를 가지듯이 재산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안구나 생명은 자신의 소유로 다른 사람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강제로 재분배 될 수 없듯이 재산도 그렇다는 것이다. 개인의 재산도 재분배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직의 철학 안에서는 자선을 통한 사회적 구조를 제외하고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을 확보할 수 없다. (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도와줘야 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격차이론에 기초한 분배정치학과 분배경제학은 ‘증오와 분노의 정치경제학, 르상티망(강자에 대한 약자의 시기와 질투심)의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낸다. 격차해소 정책이 사회적 논란과 강등만 부추기고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는 것은 격차해소라는 의제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전제하고 갈등의 증폭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감옥에 있는 조국이라는 전 교수님이 르상티망을 즐겨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내로남불의 표본이 사람들을 기망하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총선에서 그를 찍어준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좌파의 격차해소 정책은 사회통합이 아닌 배제와 갈등을 기본으로 하며, 본질적으로 ‘세상=제로섬’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정책 의제는 좌파의 격차해소가 아니라 우파의 ‘사회적 약자 지원, 가난의 추방’이 되어야 한다. 가난은 사회적 악이지만, 격차는 사회적 악이 아니다.
코라시아,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