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18–대한민국 정체(政體)를 부정한 좌파 신영복의 글씨가 지닌 의미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25 16:34 | 최종 수정 2024.06.25 16:47 의견 0

신영복은 글씨를 잘 쓴다는 얘기를 받습니다. 이완용도 글씨를 잘 썼습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염원하는 독립문의 글씨가 바로 이완용의 작품입니다. 매국노 이완용과 독립이라는 글씨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체(政體)를 인정하지 않았고, 속마음에서는 사상적으로 전향하지 않았던 신영복의 글씨도 이완용 글씨처럼 취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식은 글씨에는 신(神·정신), 기(氣·기상), 골(骨·골격), 육(肉·근육), 혈(血·혈색)의 다섯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중 제일 먼저 언급한 게 정신입니다.) 왜 그런지 우리는 신영복의 글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신영복은 <담화>에서 다음처럼 말합니다.

“서도(書道)의 관계론은 서도의 미학이 ‘관계’를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우선 서도는 서양에는 없는 장르입니다. 서양에는 캘리그래피, 펜맨십이란 개념이 있지만 그것을 서도와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글자의 조형미 이상이 못 됩니다. 서도의 미학이라는 것은 형식미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관계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쓴다고 합시다. 첫 획을 너무 위로 치켜 그었다고 해서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인생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우고 다시 쓰거나 개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다음 획으로 그 실수를 만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字)가 잘못된 경우에는 그다음 자 또는 그다음 다음 자로 보완해야 합니다. 한 행(行)은 그다음 행으로 그리고 한 연(聯)은 그 옆 연으로 조정하고 조화시켜 가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끊임없이 하면서 써야 합니다. 그것도 필맥과 전체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굉장한 집중력이 요구됩니다. ...(중략)

청나라 때의 유희재(劉熙載)는 <서개(書槪)>에서 ‘서여야(書如也), 여기학(如其學), 여기재(如其才), 여기지(如其志), 총지왈(總之曰), 여기인이이(如其人而已)’라고 합니다. 서여야(書如也), 서(書)‘는 여(如)서, 같은 것이란 뜻입니다. 무엇과 같다는 뜻인가요? 우선 글자와 그 글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습니다. 한글은 기호이기 때문에 여(如)가 아니지만 상형문자인 한자는 글자와 대상이 같습니다. 많은 글자를 소개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하나만 소개합니다.

전서(篆書) 뫼산 자입니다. 글자와 그 글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습니다. 산자가 산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갔다는 것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청나라 때의 유희재가 <서개>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서(書)는 그 사람의 학(學)과 같습니다.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학식이 그래 담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재(才), 그 사람의 지(志), 사상과 뜻이 글에 담깁니다. 총지왈 최종적으로 그 ‘사람과 같다’ 즉 글씨와 사람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도의 관계론은 구도에 있어서의 조화에 그치지 않고 이처럼 서와 사람의 관계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글과 그 시대의 과제가 함께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독립(獨立)이란 글을 안중근 의사가 쓰고 단지장락(斷指掌落)을 해야지 맞습니다. 그 사람과 글씨 그리고 그 시대와 글이 조화되는 것이지요. 이완용이 독립이라고 쓰면 글과 그 사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중략)”

신영복은 ‘글씨와 사람이 같다’고 했습니다. ‘이완용이 독립이라고 쓰면 글과 그 사람이 같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절대적으로 동감합니다. (참고로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결성한 것은 독립문을 포함한 독립공원 건립과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 때문이었다. 발기인 가운데 이완용 형제가 가장 많은 100원씩 200원을 냈고, 안경수 40원, 김종한·권재형 30원씩 등 총 510원을 모금했다. 독립협회에서 이완용의 지분이 상당했고, 이완용 스스로 독립문의 편액을 쓸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완용은 급기야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이 된다. 지금 대한민국 사람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이완용의 독립문 글씨와 같은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영복은 <담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작품) <서울>은 현재 서울시장실에 걸려 있습니다. 초대 민선 시장인 조순 시장 때 시청에 기증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시장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시청에 걸려 있습니다. 지난번 <변방을 찾아서>의 기행 때 시장실을 방문하여 박원순 시장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청와대는 ‘북악’을 하고, 서울시청은 ‘한수’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청와대는 권력 쟁취에 여념이 없더라도 서울시청은 민초들의 애환을 안고 700리 유정(有情)하게 흘러가라는 뜻이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100% 공감을 보였습니다. 자기도 시민운동을 한 변방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겉과 속이 전혀 달랐던 박원순 시장의 비참한 말로는 우리 국민이 아는 그대로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아직 그 글씨를 그대로 걸어두는지 궁금합니다. 그대로 걸어뒀다면 철거가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고 했으니까요)

신영복은 북한이 매우 애지중지한 인물이었습니다. 1975년 한국 정부는 베트남 패망 직전 억류된 한국 외교관 3명과 국내에 수감된 간첩 21명을 교환하기 위한 교섭을 벌였습니다. 당시 북한이 요청한 교환 대상자에 신영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신영복은 김일성 노선을 충실히 추종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도 소개했듯이 신영복은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런데도 운동권은 신영복을 ‘시대의 양심수’로 포장했고, 중앙일보는 신영복의 글을 장기 연재했고, 자유민주주의를 그렇게 중시한다던 조선일보는 어이없게도 2015년 신영복에게 만해문예대상을 수여했습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고 주장한 신영복. 그의 글은 문재인 정부 시절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걸렸습니다. 청와대 곳곳에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에겐 춘풍처럼 관대하고 자기에겐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이라는 신영복체 액자를 돌렸는데, 문재인 정부의 특징은 이와 정반대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양두구육(羊頭狗肉)’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신영복체의 글씨는 급기야 국정원의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라는 원훈석에 쓰였습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시각에서 보면, 골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가 국정원에 떡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국가에 대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이순신 장군이나 채명신 장군 같은 사람이 써야 맞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서울시장실에도 신영복의 글씨가 들어갔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완용의 ‘독립’이라는 글씨가 전국 방방곡곡에 걸린 꼴을 참을 수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국민이라면 신영복의 글씨가 대한민국의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쓰이는 걸 참아야 되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신영복의 망령처럼 보이는) 소주 처음처럼’을 무지 싫어합니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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