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19–감옥에서 책만 읽은 책상머리 좌파 지식인의 비뚤어진 눈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25 16:26 | 최종 수정 2024.06.27 05:59 의견 0

‘철학은 국가의 기초’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특정 국가가 어떤 철학을 갖느냐에 따라 나라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남한(자유민주주의)과 북한(사회주의)의 여정이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남한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고, 북한은 세계 최빈곤 국가로 전락해 ‘거대한 강제수용소이자 인간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우수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유와 정의, 공정한 평등 즉 공평(公平), 개인 행복의 보장 등을 추구하는 철학이 자유민주주의에서 꽃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나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유와 공정, 개인 행복이 설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어떠한 지원이 없더라고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면, 그 자체로 엄청난 힘을 발휘해 부유하고 번영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The natural effort of every individual to better his own condition, when suffered to exert itself with freedom and security is so powerful a principle that it is alone, and without any assistance, not only capable of carrying on the society to wealth and prosperity)”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보다 이 구절이 더 중요하고 ‘국부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국부론>에서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폭력을 끊임없이 걱정해야 하는 불행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자기 부의 대부분을 파묻거나 숨기곤 한다. 이것은 터키와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일반적인 관행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폭력과 공포가 난무하는 사회, 즉 전제주의 국가(왕정과 독재국가)에서 국민이 잘 살고 행복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에 나서다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 실감합니다. 여행지를 잘 모르면 그저 지나가는 풍광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근데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비뚤어진 눈’으로 여행지를 보는 겁니다. 대체로 좌파 지식인들은 ‘가난하고 빈곤한 지역’을 그릴 때 ‘소박하고 정겹다’는 표현을 씁니다. 정감 있는 언어로 현장의 비참한 현실을 감추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세상의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묘사합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그러면서도 그렇게 ‘가난하고 빈곤한 지역’에 살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욕을 해대는 자본주의 세상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그렇게 깎아내리며 친북을 행하는 자들이 왜 (자신들이 그리 좋아하는) 북한에 가서 살려고 떠나지 않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영복도 묘한 말재주를 부리며 자본주의 폄하에 여념이 없습니다. 다음은 <담론>에 나온 글입니다.

여행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전 과정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리 멀리 이동하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만났더라도 진정한 여행은 아닙니다. 지금 함께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후기 근대사회의 생생한 얼굴을 대면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비(非)근대의 조직과 탈(脫)근대의 모색이어야 합니다.

외 계획의 첫 번째 방문지가 콜럼버스가 출발한 우엘바 항구입니다. ...(중략) 산타미리아 호는 근대의 아이콘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1492년을 근대의 시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은 자본주의의 원시축적이 시작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근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관점에 동의합니다....(중략) 신대륙의 금은은 물론이고 막대한 인적 자원이 자본주의 성장의 물적 토대가 됩니다. 자본주의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서는 참혹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중략)

원테쥔(溫鐵軍)은 <백년의 급진>에서 자본주의는 유럽 국가들이 국내의 빈민층과 범죄인들을 식민지로 유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합니다. 금은의 유입과 노동력의 유출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자본의 유입은 자본의 상대적 과잉이 되고 노동력의 유출은 노동력의 부족으로 이어져 자본과 노동의 계급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계급 타협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중산층 중심 다이아몬드형 사회 구성이 가능한 것이 바로 콜럼버스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모든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바로 이러한 근대의 발전 경로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중국은 근대사회의 이러한 발전 경로를 모델(path-dependency)로 하지 않고 내발적(內發的) 경로를 만들어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유럽 근대화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인구의 50% 정도에 달하는 빈민층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렴한 자본의 공급과 빈민층의 이출(移出)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현대 미국을 미국의 역사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대 유럽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와 함께 읽는 일입니다. 대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반대의 것과 대비해야 합니다. 문제는 당시의 식민주의적 세계 경영이 오늘날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대륙의 발견은 자본주의의 원시축적이 시작된 시점’이라는 좌파들의 규정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러면서 중국 학자인 원테쥔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노엄 촘스키나 이매뉴얼 월러스틴 간은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식민주의적 세계 경영’이라는 개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합니다.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좌파 이념’에 물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봐야 할 게 ‘신영복의 중국 사랑’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민주당 사람들의 친중(親中)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중국이 한사군(漢四郡) 이래 2천년 가까이 한반도를 괴롭혀서 보다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에 독립문(獨立門)을 건설한 사실, 그리고 한국 전쟁 때 중국 인민군의 참전으로 통일의 기회가 날아갔다는 사실이 새겨지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면서 인디언 학살 등 반미(反美)를 부추길 만한 얘기는 끊임없이 되풀이합니다.

신영복이 말한 ‘중국은 근대사회의 이러한 발전 경로를 모델(path-dependency)로 하지 않고 내발적(內發的) 경로를 만들어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유럽 근대화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라는 부분에서 중국 사회주의를 떠받드는 사대주의 사회주의자의 모습,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비하와 저주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생각의 비약일까요?

그가 소개한 원테쥔은 ‘골수 공산주의자이자 중국의 관변학자’입니다. 1951년 베이징 출생으로 중국인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연구실,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농업부 농촌경제연구센터,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회 등에서 근무하는 등 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삼농(三農. 농촌 동민 농업) 문제’를 처음 제기하여 중국의 최우선 어젠다로 확립하게 했으며, 그 공로로 2003년 CCTV가 선정하는 경제부문 올해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원테쥔은 그간 중국이 자본의 극단적인 결핍이 생겼을 때나 여러 경제 위기들이 생겼을때, 농촌으로 인해 자본을 획득하고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만큼 농촌이 더 이상 희생되어 해체되게 두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업자본 과잉 문제를 향촌사회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중국은 넓고 투자할 영역도 많으므로 서부대개발정책을 통해, 아시아 내륙방향으로 경쟁을 지속한다면 계속 더 고속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서구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도시화를 시켜 농촌을 공동화하는 것을 피하고, ‘성진화(城鎭化)’를 통해 농촌 가운데 개발된 지역에 읍내를 건설해서 내수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농민의 생활여건을 향상시키고, 농민이 소자산계급의 지위를 유지하여 향촌사회를 유지하도록 하면서, 토지사유화는 강경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성진화란 정부가 인구밀도가 도시보다 더 작은 지역을 육성하다는 방식으로 도시화와는 다른 중국 고유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2·3차 산업의 발전은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성공하기 쉬운 만큼 경제법칙에 어긋나 실패하게 될 것이 분명한 정책이자 중국 농민에게 실상을 감추는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식의 보여주기식 정책’이 될 게 분명합니다.)

신영복은 자본주의의 가치를 폄하하고, 도시의 발전에 강력한 거부감을 내비칩니다. ‘전근대적 사고, 사회주의적 사고’에 꽁꽁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논거로 원테쥔의 책을 소개한 데서도 그의 ‘친중-반미적 시각’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더 이상 속는 대한민국 국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코라시아,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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