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담론>의 허구17–신영복의 시장경제에 대한 적개심!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25 16:20 의견 0

이념이나 사상의 정신적 노예가 된 사람은 ‘사이비종교의 노예가 된 사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비종교나 무속에 푹 빠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멀쩡합니다. 오히려 사회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돌변합니다. 마음에는 ‘독선(獨善)과 오만(傲慢)’이 가득합니다. 어떤 말로도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진실과 사실을 들이대도 마지막에는 ‘네가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라고 반박하니, 결국 설득하려는 사람이 지쳐서 나가 떨어집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고 했는데, 그건 ‘종교의 노예가 된 사람’은 ‘공산주의의 노예가 될 수 없는 사람’이기에 한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공산당의 신봉자이면서 동시에 종교의 신봉자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젊어서 사회주의 이념에 물든 사람도 비슷합니다. 이들은 늘 ‘아군 vs 적’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합니다. 이들 가운데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을 여럿 봤는데, 그들은 생각의 방향을 바꿨을지 몰라도 생각 방식은 여전히 ‘아군 vs 적’의 이분법적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중간이나 중용은 없었습니다.

내심 ‘결코 전향한 적이 없다’는 신영복은 자신의 글 곳곳에서 ‘자본에 대한 (불같은) 적개심’을 보여줍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신영복은 꼭 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에 대한 철저한 불신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과 공감’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좌파 이념이 일반인들에게 스며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스스로 ‘반(反)자본주의자, 반(反)시장경제주의자, 반(反)민주주의자’로 변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대한민국에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파 지식인 가운데도 신영복의 민낯을 모르고 그를 좋게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소주 ‘처음처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영복이 썼다는 ‘처음처럼’ 글씨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글씨를 보면 ‘하회탈처럼 온화한(?) 가면 뒤에 숨은 확신범의 민낯’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신영복의 ‘글씨와 사람’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신영복은 <담론>의 ‘비와 우산’이란 글에서 다음처럼 썼습니다.

“자본은 나누지 않습니다. 자본은 본질적으로 자기 증식하는 가치입니다. 자본 축적의 자본은 운동법칙입니다. 이것이 나의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인 한 기부나 나눔은 불가능합니다. 자본으로서의 성격이 제기된 이후의 부(富)라야 비로소 나누게 됩니다. 사심 없는 기부는 주로 김밥 할머니들이 합니다. 김밥 할머니들이 모은 돈은 자본이 아닙니다. 자본은 그것이 자본인 한 나눌 수 없는 속성을 가집니다. 이 나눔은 대단히 중요한 사회문제로 등장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기계화, 자동화, 인공지능화와 함께 상대적 과잉인구가 양산됩니다. 해고와 비정규직은 우리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분배 방식만으로는 재생산 시스템이 작동될 수 없습니다.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력의 요소 소득만으로는 유효 수요가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나눔의 문제는 인정이나 동정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후기 근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로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복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은 자본이 나눌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시장경제의 총아인 기업의 주주는 어떤 존재일까요? 국민연금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의 지분율은 2023년 말 기준으로 7.35%이며 가치는 34조 4646억원이었습니다. 삼성전자가 잘 돼야 국민연금(국민의 재산임)이 잘 되고 결국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신영복이나 좌파 지식인들은 애써 무시합니다.

신영복의 사고 구도는 대립과 갈등입니다. 부자 대 빈자, 자본가 대 노동자, 갑(甲)과 을(乙), 지배자와 비지배자, 생산자와 소비자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치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서울에서 32평형 아파트를 가진 회사원(과장급이라고 가정합시다) 김철수를 보면 그가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중산층 혹은 빈곤층(강남 부자와 비교해)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시골 사람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부자입니다. 그는 회사에서는 노동자이나 투자를 통해 주식을 가지고 있다면 주주(자본가)입니다. 윗사람에는 을(乙)의 위치지만 대리나 사원에게는 갑(甲)의 위치입니다. 납품할 곳에 가면 을이지만, 협력업체에는 갑입니다. 회사에 다녀 물건을 생산한다면 생산자이겠지만, 퇴근해서 슈퍼마켓에 들르면 소비자입니다. 밖에서는 사회인이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다정한 아빠가 됩니다. 그는 부자이며 빈자이고, 주주이며 노동자이고, 갑이면서 을이고,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고, 무엇보다도 사회인이면서 가정인입니다.

신영복은 이처럼 사람이란 ‘복잡한 다층적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심 없는 기부는 김밥 할머니들이 한다고 했는데, 그분들이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대한민국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인도나 아프리카 빈국의 길거리 노점상은 기부할 돈을 벌 환경이 안 됩니다)

신영복이 감옥에 간 사이에 대한민국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선배 세대들이 가발을 만들고,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중동에 가고, 그리고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서 자본을 만들었습니다. 그 자본으로 공장을 짓고 도로와 항만을 건설했습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습니다. 입만 갖고 살아가는 좌파 지식인들은 이러한 ‘경제 발전의 진실’을 인정하면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느끼는가 봅니다. (좌파 지식인인 유시민 김제동 강신주 등등이 대체로 그런 성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책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돈벌이도 해보는 과정에서 커집니다. 그게 올바로 커지고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신영복의 삶에는 일반인들이라면 겪었을 그런 ‘일상의 경험, 일상의 기쁨과 슬픔’이 없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상인이 아니라 범죄자들고 어울려 경험한 삶입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사고’가 자라나지 못하고, 외골수에 더욱 빠지게 됩니다. <담론>에는 그런 외골수의 뒤틀린 사고를 지닌 사람의 ‘닫힌 이념과 편협한 사상의 말장난’이 가득합니다.

코라시아, 필명

<오피니언은 본 지의 펴집방향과 관계 없습니다>

저작권자 ⓒ 수도시민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