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담론>의 허구7 –마오쩌둥은 낭만과 창조의 인물? <인민 3부작>을 살펴야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12 20:52 | 최종 수정 2024.06.13 18:47 의견 0

신영복의 사유 세계는 친중(親中)의 냄새를 물씬 풍깁니다. 70~80년 대 운동권 세력이 추종했던 중국 공산당의 인물들, 특히 마오쩌둥에 지극히 우호적입니다.

다음은 신영복의 <담론>에 실린 내용입니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楚辭(초사)> 漁父辭(어부사)에 나오는 명구(名句)로 회자됩니다...(중략)

중국 역사에서 남방이 패배의 땅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낭만과 창조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초사>에서 우리가 구성할 수 있는 사유의 폭은 대단히 높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1972년 핑퐁 외교로 닉슨 대통령이 중공(中共)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마오쩌둥 주석이 닉슨에게 <초사>를 선물했습니다. 대장정 동안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던 <초사>입니다. 닉슨과 <초사>의 대비가 당황스럽고 그 선물의 숨은 뜻을 알 수 없지만 <초사>에 대한 마오의 애정만은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마오 사상의 창조성과 그의 문풍(文風)의 원류가 바로 <초사>의 세계라고 합니다. (마오쩌둥은 초나라가 있었던 중국 후난성 출신이다) 중국 혁명 과정에서 흔히 류사오치(劉少奇)와 마오를 대비합니다. 류샤오치는 국민당 지배하의 상해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지하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마오는 해방구를 건설하여 국민당 군과 대적했습니다. 적 치하에서 조직 보위를 위한 고도의 경각성이 요구되었던 사류샤오치에 비하여 적과의 정면 대결을 주로 했던 마오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조직의 류샤오치와 이론의 마오’라는 헌사가 그것을 설명합니다. 조직 보위와 경각성은 극도의 보수적 대응을 요구하는 반면 마오의 해방구 건설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합니다. 노농연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없었던 중국 혁명의 창조성입니다. 이외에도 마오는 많은 시를 쓰기도 하고 <모순론>과 <실천론> 같은 철학적 저작도 내놓습니다. 그래서 이론의 마오쩌둥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남방의 <초사> 문풍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마오에게 <초사>는 그런 것입니다. 낭만과 창조의 땅 <초사>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현실과 이상의 지혜로운 조화에 머물지 않고 훨씬 더 큰 담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영복의 글을 읽으면 ‘마오는 낭만과 창조의 인물’로 읽힙니다. (이 대목에서 신영복은 중국 공산당에 속아 <중국의 붉은 별>이란 책으로 마오쩌둥을 미화했던 에드가 스노우, <8억인과의 대화>로 중국의 선전선동에 넘어간 리영희 등과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과연 ‘낭만과 창조의 인물’이었던 걸까요?

중국 혁명의 비극은 네덜란드 역사학자인 프랑크 디쾨터가 쓴 <인민 3부작>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음은 <인민 3부작>의 서문 내용. (이 책은 눈물과 한숨과 분노 없이는 읽기 힘들며, 필자도 굶주림 속에 ‘식인(食人)이 성행했다’는 부분은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냥 넘겼습니다 –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실체를 알려면 <인민 3부작>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중국을 얘기하는 사람은 중국전문가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 거둔 그들의 승리를 ‘해방’이라고 말한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로 쟁취한 자유를 자축하며 환호하는 군중을 떠올리게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해방과 그 뒤를 잇는 혁명의 이야기는 평화나 자유, 정의와 무관하다. 다른 무엇보다 계산된 공포와 조직적인 폭력의 역사를 보여 준다.”

“혁명이란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해방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공산당의 적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대공포 시대가 도래했다. 마오쩌둥은 1000명당 한 명을 죽이도록 할당량을 하달했지만 많은 지역에서 할당량의 2~3배가 넘는 사람들에게 대개는 조잡한 구실로 처형이 행해졌다. 그 결과는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전면적인 붕괴였다. 여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 학생들이 적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할당량을 채우려는 당간부들이 죄수를 임의로 선정해서 총살을 시키기도 했다.

1951년 말까지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집회가 열리는 대회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됐으며 대중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숲이나 계곡, 강가에서 홀로 또는 떼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중국 전역에 산재한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몇 년 뒤 폭력은 감소했지만, 공산당이 원하는 ‘신인민’이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한 사상개조는 끝나지 않았다. 관공서나 공장, 소규모 작업장,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에도 ‘재교육’을 받아야했으며, 신문과 교과서를 통해 올바른 대답, 올바른 생각, 올바른 표어를 배웠다.” (중략)

“농촌에서는 집산화를 둘러싼 거센 저항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1956년에 이르러 농부들이 농기구와 땅, 가축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이동의 자유를 잃었고, 정부에서 정한 가격에 양곡을 국가에 판매하도록 강요받았다. 지역 공산당 간부의 명령만 기다리는 채무 노동자로 전락했다. 1954년에 정부 스스로 인정했듯이 농민들은 해방 전과 비교했을 때 식량이 3분의 1이나 줄어든 상황에 처했다. 거의 모든 농민들이 기근에 허덕였다.

1957년에 들어서는 마오쩌둥이 지식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50만 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을 강제노동수용소 보내면서 소수민족, 종교단체, 농민, 기능공, 기업가, 제조업자, 교사, 학자, 당 내부의 회의론자 등 반대자를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산당의 행보가 최고조에 달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지 10년 만에 주석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략)

“마오쩌둥의 집권 후 초기 10년은 최소 5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20세기 최악의 폭정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도 중국이 평화롭게 해방을 맞았다는 수십 년에 걸친 선전 때문에 공산당이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프랑크 디쾨터의 지적처럼 한국의 좌파와 민주당 사람들 가운데는 중국에 매우 우호적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가 같은 나라.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中國夢) 함께 하겠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김부겸 전 총리는 중국의 혁명가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를 존경한다고 밝혔습니다. 저우 전 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 혁명과정에서 후배인 마오쩌둥(毛澤東)을 지도자로 세운 뒤 그의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키는 절충자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다만 김 전 총리가 착각한 것이 저우언라이는 죽을 때까지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자유민주세계의 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좌파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독재자였다고 매우 비난합니다. 인권이 유린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경제기적을 만들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가안정을 이룩한 이야기를 하면 ‘독재자를 옹호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라면서 눈을 부라리면서 싸울 듯이 덤벼듭니다. 그러한 좌파 인사들이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마오쩌둥, 천안문 사태를 일으킨 덩샤오핑, 지금도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에게 지극히 관대하며 심지어 ‘존경심’가지 표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정의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선택적 정의’에 익숙해서일까요? 2024년 총선에 나온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처럼... ‘정의’에는 보편적 기준이 있어야 할 텐데 좌파 인사들의 정의는 정말 ‘고무줄 잣대’인 것 같습니다. 그런 ‘고무줄 잣대의 정의 기준’을 10대와 20대 등 미래 세대에게 가르치는 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는지... 좌파 인사들도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그런 ‘엉터리 정의관’은 가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라시아(필명),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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