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담론>의 허구8 –북한은 자주(自主)이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국가?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12 20:43 | 최종 수정 2024.06.13 18:47 의견 0

신영복은 1968년부터 1988년까지 20년을 감옥에서 보냅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전향서에 서명하고 난 후 자유의 몸이 됩니다. 1941년생이 27세부터 47세까지 세상과 격리된 셈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생산적이어야 할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감옥에서 있던 시간은 대한민국 경제가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경제발전의 가장 객관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는 1인당 국민소득(GDP)은 1968년 169달러였는데, 1988년 4548달러로 무려 27배나 늘어났습니다. 1988년 개최된 올림픽을 계기고 대한민국에는 ‘마이카(My Car)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신영복은 이러한 경제발전의 흐름을 직접 체험하지도 못했고, 기여하지도 못했습니다.

신영복은 ‘전향서’를 썼다고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이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이디어를 잊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이념이나 사상은 30세를 넘은 다음에는 바뀌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1980~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낸 40~50대. 혹은 60대 초반의 사람들이 여전히 운동권 시각, 전교조 시각, ‘반미(反美)’의 시각을 갖고 세상사를 보고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게 ‘젊은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영복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통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통일(統一)을 통일(通一)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평화 정착, 교류 협력만 확실하게 다져나간다면 통일 과업의 90%가 달성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평화 정착, 교류 협력,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통일입니다. 통일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것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통일로 가는 길은 결코 험난하지 않습니다. 통일(通一)에서 통일(統一)로 가는 과정을 지혜롭게 관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화(和)에서 화(化)로 가는 화화(和化)의 모델입니다. 통일(通一)과 화화(和化)는 통일의 청 사진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문명사적 전망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 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인 것이지요. 이러한 세계사적 과제가 경과해야 할 경로에 대한 현실적 구상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경로를 거치든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그것의 출발 지점이 되리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중략)

일(通一)과 화화(和化)는 최후의 그리고 최선의 선택입니다. 지속 가능성이 회의되고 있는 불안한 세계 경제질서에 대비하여 나름대로 자기의 경제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국가들이 중장기적으로 지향하는 시스템이 바로 내수기반의 자립 경제구조입니다. 이러한 자립 구조는 최소 7000만의 인구 규모가 요구됩니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를 비롯해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가 주목받는 까닭 역시 인구 규모와 내수 중심의 자립 구조 때문입니다. 분단은 이러한 가능성마저 봉쇄하는 것입니다. 남북 관계의 현실은 모든 새로운 전망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을 지극히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화동(和同)담론을 재론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중략)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두 개의 국가 경영의 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변방에서 2천년 동안 국가를 지탱해올 수 있었던 것이 두 개의 국가 경영 축을 지혜롭게 구사해왔기 때문입니다. 자주와 개방이라는 두 개의 축입니다. 자주는 우리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국가를 지키는 것이고. 개방은 세계와의 소통을 긴밀히 하는 것입니다. ...(중략) 오늘날의 남북 분단은 자주와 개방이라는 두 개의 축이 남과 북으로 각각 외화(外化)되어 나타난 것으로 설명합니다. 분단을 냉전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는 지금까지의 관점과는 다릅니다. 돌이켜보면 자주에 무게를 두었을 때는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반면 고립되고 정체될 위험이 없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개방에 무게를 두었을 때는 고려 후기와 통일 신라처럼 문화는 발전하지만, 국가의 주권이 침해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개화 정책은 망국과 식민지로 귀결됩니다. 불과 100년 전의 역사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두 개의 경영 축을 지혜롭게 구사하기는커녕 그 주도권을 다른 나라들에게 빼앗겨 그들에게 역용(逆用)당하고 있습니다.”

신영복은 글에서 ‘평화 정착, 교류 협력’으로 통일의 90%가 달성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 사람들이 왜 그리도 북한 김정은 정권을 두둔하면서 ‘평화통일’을 외친 사실과 맥이 닿습니다.

신영복은 인구 7000만이면 ‘내수기반의 자립 경제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남북한 합친 숫자입니다. 그렇지만 경제전문가들은 대체로 1억명은 넘어야 내수기반의 자립경제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7천만을 자의적으로 선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신영복이 예시로 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도 모두 인구가 1억을 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연결된 상황에서 어떤 국가도 ‘내수기반 자립경제’를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미국 같은 나라도 순수하게 내수기반 자립경제를 외치지 않습니다. 신영복의 자립경제는 1980년대 좌파 운동권의 주장이나 목표와 비슷합니다.

신영복은 특히 자주와 개방이라는 두 개의 축이 남과 북으로 각각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주에 무게를 두었을 때는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남한이 ‘개방 국가’이니, 그가 말하는 ‘자주’는 북한을 의미합니다. 신영복은 또한 ‘조선 후기 개화 정책은 망국과 식민지로 귀결됩니다’라고 했는데, 조선은 실상 개화가 늦고 폐쇄를 고집했다가 망한 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를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신영복의 이념은 ‘전향서’를 썼다고 해도 결국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가졌던 ‘친북(親北)’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케인스의 말 대로 젊은 시절 굳어진 생각은 참으로 바꾸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코라시아(필명), 블로거

<오피니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전혀 관계 없음을 밝힙니다>

저작권자 ⓒ 수도시민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