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조선미술재건본부 주최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고희동 등. 한복을 입은 고희동 옆은 군정 치하 서울시장이던 윤치영이고, 이종우, 배렴, 장우성 뿐 아니라 휴전 후 월북한 이쾌대도 자리를 같이 했다. 이승만은 10월 16일 오후에 귀국했으니까 이 전람회가 이승만이 고국에서 참석한 첫 행사일 것이다. 조선미술재건본부는 해방 며칠 후에 발족했고 고희동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이 행사를 조직했다. 하지만 조선미술재건본부는 좌우로 갈라지고 고희동은 우익 미술단체인 조선미술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다시 1950년 6월 25일로 돌아갑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혼자 피난을 간 후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6월 27일 밤 10시가 돼서야 대통령이 방송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유엔이 곧 도우러 올 것이라고 대국민 성명을 냈다는 점은 도대체 국방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여하튼 이철원 공보처장이 KBS를 국방부 정훈국에 넘겨 준 26일 아침부터 KBS는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 1905~1983) 대령이 보낸 공보과장 김현수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국방부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선무(宣撫) 방송 마이크를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은 김 대령이었다. 26일 오전에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KBS에 나와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성모 장관은 그가 평소에 이야기하듯이 국군이 적군을 패퇴시킨다고 했으나, 무초 대사는 무언가 모호하게 자신 없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방송이 나오는데도 대통령은 말이 없으니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한강을 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생방송으로 잠시 나오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결국 가장 많은 말을 한 사람은 김현수 대령이었다. 김 대령은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은 참고 기다려 달라는 식의 방송을 했다. 그렇다고 당시 우리 정부 요인들이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군은 한국은행에 있던 금과 달러를 황급하게 피난시켰고, 김재원 박물관장은 문화재를 피난 시켰다. 어느 누구의 지시가 없이도 할 일을 알아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방부가 사실을 은폐한 방송을 해서 서울 시민들이 피난 갈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 비난할 수 있겠으나 당시 상황에서 ”북한군 침공으로 서울 함락이 눈앞에 있으니 시민 여러분들은 어서 빨리 피난 가십시오“라고 방송할 수는 없는 것이다. 6.25 같은 비상상황에서는 정부 요인들과 군경이 최대한 빨리 서울을 탈출해서 훗날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방 태세를 게을리 한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그런 상황에서 선무방송을 한 실무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26일과 27일에 정동에 있는 KBS에 나와서 선무 방송을 한 사회 명사가 몇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널리 알려진 사람은 시인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이다. 왜냐하면 모윤숙은 KBS에서 방송을 하고 90일 동안 공산군과 좌익을 피해서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살아 남아서 자신의 경험담을 여러 차례 글로 남겼을 뿐 아니라 경기도 광주에서 피해 있으면서 전사한 국군 소위의 시신을 보고 지은 시(詩),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너무 유명해서이다.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6.25 전쟁 문학의 백미(白眉)로 평가되어 교과서에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6월 26일과 27일 KBS에 나와서 선무 방송을 한 사람은 모윤숙 외에도 더 있었으니, 고희동과 박종화였다. (고희동은 나의 외조부이다.)
미술가인 고희동(高羲東, 1886~1965)과 소설가인 박종화(朴鍾和, 1901~1981)가 그런 상황에서 KBS에 나와서 선무 방송을 하게 된 연유는 두 사람이 문총(文總), 즉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회장과 부회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총(藝總)의 전신인 문총은 1947년 2월에 좌익 문화단체에 대항해서 민족진영의 문화예술인이 만든 단체로, 회장은 고희동, 부회장은 박종화와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 임원은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5~1977), 평론가 이헌구(李軒求, 1905~1982) 등이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고희동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시 민족진영 화단(畫壇)과 문화계의 리더였다. (‘계급’을 주장하는 좌익은 신탁통치 찬성이고, ‘민족’을 내세운 우익은 신탁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우익이 ‘민족진영’이었다.) 고희동은 물론이고 김광섭과 이헌구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이들은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과 이철원도 친일에서 자유롭고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박종화, 채동선, 김광섭, 이헌구는 고희동 보다 한 세대 아래였다. 고희동과 같은 세대인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이광수(李光洙, 1892~6.25 납북), 화가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질이 나쁜 친일이었고, 음악가 현제명(玄濟明, 1902~1960)도 친일 이력으로 이런 단체에 나설 수가 없었다. 좌익에 맞서기 위해서는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은 해방 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겸 학생처장으로 국대안(國大案) 파동을 헤쳐 나갔는데, 어떤 연유인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령 군복을 입고 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어서 6.25를 맞았다.
고희동과 박종화는 이선근 대령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26일과 27일에 KBS에 나가서 선무 방송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희동은 6.25를 회고하는 기사에서 국방부로부터 부탁을 받았다고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반면에 모윤숙은 자기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쓰기도 했고 국방장관 비서로부터 방송에 나가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쓰기도 했다. 고희동과 박종화가 어떤 내용으로 방송을 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김현수 대령이 써 준 대로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림은 잘 그리고 소설을 잘 썼겠지만 방송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미숙했을 것이기에 잘 알아들은 사람도 별로 없지 않았겠나 한다. 반면에 모윤숙은 여성의 목소리로 국군의 분발을 촉구하는 시(詩)를 즉흥적으로 지어서 읽는 등 적극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KBS를 마지막까지 책임졌던 김현수 대령도 전선(戰線)의 상황이 그토록 급박한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김 대령은 27일 밤늦게 이 대통령 방송을 내보낸 후 한강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집에 갔다가 폭발음을 듣고 KBS로 다시 나와서 공산군에 피살됐기 때문이다. 고희동과 박종화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 후 90일 동안 숨어 살아야 했으나 두 사람 모두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장면 대사의 동생인 서울대 미대학장 장발(張勃, 1901~2001)도 피해 다닌 덕분에 살아남았다. 공산군은 숙청 대상자 명단과 이들의 주소는 물론 친척 집 주소까지 갖고 서울에 내려왔다. 동양화가 월전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은 피난을 가지 못해서 할 수 없이 좌익 미술가동맹이 하는 집회에 참석해야 했는데, “사회자는 감옥에서 갓 나온 듯 머리를 박박 깎은 서양화가 기웅(奇雄)이었다. 그는 ‘김일성 동무가 남한 사람을 다 용서해도 미술가 가운데 고희동과 장발 두 사람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했다”고 자신의 회고록 <화맥인맥>(1982년)에 기록했다.
공산군과 완장을 찬 공산군 동조자들은 이들의 가족은 물론이고 자식과 친척 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사람들을 괴롭혔으니 이들의 가족과 친척이 겪은 고초도 필설(筆舌)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들보다 더 한 보복을 당한 경우도 있다. 김병로(金炳魯, 1887~1964) 대법원장(김종인 박사의 조부)은 혼자 급하게 피난에 나서면서 가족들에게 전라북도 고향으로 가 있으라고 했는데, 공산군은 거기까지 찾아가서 사모님을 총살해 버렸다. 남로당 간부를 체포한 검사 선우종원(鮮于宗源 1918~2014, 서울대 총장을 지낸 선우중호 교수의 부친)의 노모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숙청 대상 리스트에는 이처럼 랭킹이 있었다. (모윤숙과 노천명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