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한 가정을 방문하고 있다. 이 대통령 피난길에 끝까지 동행한 인물은 당시 공보처장이던 이철원이었다.
김동성이 1949년 5월 23일 미국 방문을 떠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 후임으로 이철원(李哲源, 1900~1979)을 임명했다. 미 군정 공보부장으로 일하면서 이철원은 해방 후 혼란스러운 좌우 대립 정국에서 미 군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정은 당시 서울에서 발간되던 신문의 성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는 이철원에 힘입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948년 8.15 정부 수립 후 공보처장이 되기까지 이철원이 무엇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철원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이철원은 배재학당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그 후 상해로 망명했으며, 1년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저널리즘으로 박사학위를 했다고 하니까 아마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미국 체류 중에 이승만 박사를 만나서 잘 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철원은 1934년에 귀국했고 그 후 조선어학회 시간에 연루되어 고생했다고 한다. 1943년에 다시 중국으로 나갔고 해방 후에 귀국했다고 하는데, 중국에 나간 경위나 입국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철원이 영어에 능통하며 이승만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배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1949년 6월에 공보처장에 취임한 그는 서울신문 사장에 월탄 박종화(朴鍾和, 1901~1981)를 임명해서 서울신문 정간 사태를 수습했다. 그는 국회에서 다시는 정부가 신문을 폐간하거나 정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공보처 차장에는 문학평론가 이헌구(李軒求 1905~1982)를 임명했다. 이헌구는 와세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해서 서구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등 문필 활동을 하고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으나 일제 말기에는 칩거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주창하면서 좌익 문학을 신랄하게 비판해서 박종화와 더불어 확실한 민족진영(즉, 우익) 인사였다. 이철원 처장은 1949년 연말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에서 물러난 이건혁(李健赫, 1901~1979)을 공보국장으로 임명했다. 공보처장, 차장, 국장이 모두 확실한 ‘민족진영’ 인사로 채워진 것이다. (김동성 처장 아래에서 차장을 했던 김형원은 해방 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는데, 그는 중간 성향으로 얼마 후 물러나고 우익 성향인 이건혁이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6.25 남침 후 김형원은 자기는 괜찮을 줄 알고 집에 머물다가 납북됐다.)
서울신문 문제를 매듭진 이철원 처장은 전임 김동성과는 달리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공보처는 선전대책중앙위원회를 구성해서 좌익의 위험성을 널리 홍보하도록 했다. 당시는 공보처가 정당 및 사회단체 등록 업무를 했는데, 이에 근거해서 남조선노동당,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의 등록을 취소했다. 남로당이 공식적으로 불법화된 것이다. (당시 ‘사상검사’라고 불리던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는 지하로 숨어든 김상룡 이주하 등 남로당 일당을 1950년 초에 검거하며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6.25 다음 날 철수하는 국군에 의해 총살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공격하고 상황이 심각함이 알려지자 이철원은 KBS 관리를 국방부 정훈국에 인계하고 경무대로 달려갔다.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공보과장 김현수 대령을 KBS에 보내서 라디오 방송을 관리하도록 했다. 26일 오후가 되자 의정부가 함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26일 자정을 넘겨서 이철원은 황규면 비서 및 경호관과 함께 이승만 부부와 함께 경무대를 나와서 피난 길에 올랐다. 그리고 27일 저녁 7시경에 대전에 있는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이철원 처장의 권고대로 대국민 성명을 하기로 하고 서울 정동에 있는 KBS를 전화로 연결해서 이철원 처장이 써준 원고를 전화로 읽어갔다. KBS는 이를 디스크에 녹음해서 밤 10시~11시 사이에 몇 차례 내 보냈다.
그 내용은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며 서울은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상황이 심각하지만 유엔이 도와줄 것이라는 등이었는데,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분명치 않아서 듣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렇게 이해가 된 것은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KBS를 접수한 국방부 정훈국이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는 선무(宣撫)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시간대 등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다.) 이 대통령의 녹음 방송이 나간 후 KBS에 남아 있던 기술자들은 국방부 정훈국 장교의 지휘하에 방송기자재를 스리쿼터 군용트럭에 싣고 한강 다리를 건넜고, KBS는 자정 넘은 시간에 북한군 선발대에 의해 점거됐다. 그리고 밤 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잠시 귀가했다가 오전 3시 경 KBS로 돌아온 김현수 대령은 북한군의 총격으로 순직(전사)했다. (김 대령은 나중에 준장으로 추서됐다.)
당시 모습은 얼마나 긴급했으며 또한 정부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또한 이 대통령이 이철원 처장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철원은 그 후 이 대통령을 수행했는데, 1950년 8월 이철원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서 이승만은 김활란을 공보처장으로 임명했다, 3개월 후 이철원이 건강을 회복하자 이 대통령은 이철원을 다시 공보처장에 임명했고, 이철원은 1953년 3월까지 공보처장으로 일했다. 이철원은 영국 정부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하게 되어서 공보처장을 그만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이철원이 국내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여하튼 이철원은 군정기에서 53년 휴전에 이르는 동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이 틀림없는데, 그에 대한 연구나 지인들의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