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구윤철 기획재정부장관과 미국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만나 3500억달러 투자와 관련 협상을 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말이 있듯이 자고 나면 미국 발 리스크가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밤에 편하게 잠들기가 어려워진 듯 하다.

어제는 밤 새 환율이 1400원을 뚫고 올라가더니 오늘 아침은 한국의 대미 투자 3500억달러가 선불이라고 주장하는 트럼프의 발언으로 온통 시끄럽다. 그 가운데 트럼프가 말한 표현을 ‘선불’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선결과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를 놓고 논쟁이 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중국의 숏폼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을 미국이 가져가는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일본과 한국의 미국에 대한 투자금은 속도를 내고 있고 투자가 잘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3500억달러 투자는 선불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식의 “That’s up front”란 표현을 쓰면서 한미 무역협상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갔다.

트럼프는 한국이 관세 25%를 15%로 낮추기 위해서는 3500억달러를 우선 미국에 현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도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들어주기 불가능한데 심지어 선불까지 우긴다면 한미 무역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8월 말 기준 4163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가진 우리나라가 미국에 3500억달러를 일시에 투자할 경우 외환보유고 바닥으로 우리나라는 1997년 때처럼 외환위기를 맞고 IMF체제에 들어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현재 언론이나 전문분석가들은 트럼프의 “That’ up front”란 표현이 선불이냐 아니면 선결조건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시간과 힘을 뺄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두개의 해석 모두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불이든 선결조건이든 트럼프는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받아야 하는 것을 한미 무역협상의 가장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트럼프와 협상을 마무리 짖기 위해서는 이 부분이 우선적으로 해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동안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3500억달러 투자에 합의를 할 경우 ‘탄핵’이 될 수 있다고도 했고, 특히 현금으로 투자를 할 경우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7월 30일 한국 무역협상단이 백악관을 찾아가 구두로 맺은 무역협상 결과가 양국이 완전히 동상이몽이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협상단은 3500억달러 투자가 현금이 아닌 지급보증이나 융자, 또는 현물투자 등 다양한 방식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 반면 트럼프는 현금 직접 투자를 생각했던 것이다.

투자 규모도 투자시기와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신축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 같고, 투자 내용에도 우리의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트럼프는 투자내용에 대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다고 못을 박았고, 투자 이익금에 대해 원금 회수까지는 양국이 반씩 가져가고 원금 회수 이후는 미국이 90%를 가져간다고 이미 선언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는 3500억달러 전부를 현금으로 우선적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 측은 설마 “한국 외환보유고의 84%에 달하는 달러를 현금으로 요구하겠는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 것인데 반해, 트럼프는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든 관심 없이 미국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을 위해 현금을 투자 받아 미국 제조업 기반을 살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이미 무역협상 서류에 서명을 마친 일본과 같은 선상에 놓고 협상 조건을 따지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일본의 투자금 5500억달러는 일본 외환보유고 1조3242억달러의 41.5%인데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현재 보유한 달러 대신 엔화를 찍어 투자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관세가 제로(0)였던 것을 느닷없이 25%로 올렸다가 그것을 15%로 낮춰준다는 명목으로 외환보유고의 84%를 가져간다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 정부는 설마 하다가 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3500억달러를 지불하고도 없던 관세를 15% 물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빠졌다.

협상에서 항상 우선적으로 배제해야 하는 것은 ‘기대’이고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성공적인 리스크 관리는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그에 맞는 대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듣고싶은 말을 들은 것으로 해석하면서,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을 무시했다. 즉 우리가 자의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생각을 읽는 데 소홀했던 것이다.

협상 첫 단추부터 잘못 해석했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자화자찬을 늘어놨으니 이제 와서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담는 데 몇 배의 수고가 필요하게 됐다.

지금부터라도 최악의 결과를 가정해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트럼프의 요구를 들어주느니 협상을 깨는 것이 최선이 될 수 있다는 각오로 협상에 임한다면 해법이 나올 것이다.

트럼프가 지난 밤 틱톡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행정명령에 사인하기까지 중국의 시진핑에게 여러 차례 동의를 구하고 화해의 손길을 보내는 등 실질적으로는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머지않아 인도에 대해서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것이다. 돈 앞에서는 아군도 적군도 없다는 식의 트럼프의 스타일에 맞게 우리도 우리의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