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 당시 시위대에 의해 서울신문 사옥이 전소됐다. 사진은 당시 기사

서울신문의 뿌리는 일제하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 선생이 구(舊)한말(대한제국) 시절에 발간했던 ‘대한매일신보’라고 하겠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총독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는 말기에 한자표기를 ‘每日新報’로 바꾸었고, 일본어로 발간되던 경성일보 건물에 같이 있었다. 8.15 해방이 되자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일본인 경영진과 일본인 직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매일신보의 간부급 한국인도 회사를 그만두어 버렸다. 최고의 인쇄 시설을 갖고 있는 매일신보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차지하려고 했으나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치위원회를 만들어서 신문 제작을 계속했다. 해방이 되자 군소 신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연말이 돼서야 복간할 수 있었다.

미 군정은 언론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존중해서 좌익 성향의 무슨 무슨 동맹이 생겨도 두고 보았고 신문도 그러했다. 매일신보도 공무국은 아무래도 좌익 성향이 강했고 기자들 중에서 좌익 성향이 꽤 있었다. 그래서 신문 간행이 파행적이더니 9월 15일자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는 기사가 나오는 대형 사고가 났다. 결국 군정 당국은 매일신보를 11월 5일자로 무기 정간시켰다. 그리고 11월 22일자로 ‘서울신문’으로 창간 아닌 창간을 하면서 명망이 높은 오세창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연로한 오세창이 신문 편집에 간여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세창은 겨우 19일 후에 명예사장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오세창이 그만두고 부사장인 하경덕이 사장대리를 하다가 사장을 하게 된 것도 좌익성향의 기자가 유림(儒林)의 거두 김창숙 선생의 인터뷰를 제멋대로 가공해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서울신문은 좌우의 주장을 동등하게 보도하는 ‘공평한 신문’을 내걸다 보니 일관된 편집방향이 없었다. 특히 북으로 넘어가서 고위직을 한 홍명희의 아들 홍 아무개가 편집국장을 하고 좌익 성향이 강한 젊은 기자들과 공무국 직원들이 그를 지지함에 따라 주필이 반탁을 지지하는 사설을 써서 공무국에 내보냈더니 인쇄 과정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사설로 둔갑이 되는 일도 있었다. 1945년 12월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복간을 하자 동아일보는 당시 ‘민족진영’이라고 부르던 우익의 본거지가 됐고, 조선일보는 처음에는 균형을 표방하더니 곧 우익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신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당시 혼란한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서울신문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란 적산(敵産)을 군정이 인수한 것이나 이처럼 군정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운영되었다. 그러자 군정 당국은 물론이고 ‘민족진영’이라고 불리던 우익에서도 서울신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됐다. 군정 시절에 경무국장을 지낸 조병옥과 대표적인 민족진영 문필가인 월탄 박종화가 서울신문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나중에 공개된 미 군정 문서에 의하면 군정 당국은 서울신문을 좌익지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군정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데는 군정 공보부장이던 이철원(李哲源)의 영향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하경덕 사장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이건혁(李健赫, 1901~1979)을 1948년 1월에 편집국장 겸 주필로 영입했다. 경성법전을 나온 이건혁은 고희동의 큰 사위로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조선일보로 옮겨서 주로 경제 기사를 썼다. 1945년 12월 조선일보가 복간한 후 조선일보에 복귀한 그는 1946년 1월부터 9월까지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좌익에 맞선 ‘강골(强骨)’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좌익 직원의 난동에 대해 책임지고 조선일보를 물러난 후 우익 성향의 신생 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서울신문 편집국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건혁도 서울신문 내의 좌익 성향 기자를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좌익 성향 직원들이 이건혁을 협박해서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1948년 8.15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북으로 올라가고 김상용 이주하 등은 지하조직으로 숨어 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9년 5월 1일 서울신문이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한미방위동맹을 전혀 보도하지 않자 5월 4일자로 김동성 공보처장이 서울신문에 대한 무기정간 조치를 취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공무국 시설이 가장 좋았고 부수도 동아일보와 더불어 가장 많은 신문이었는데, 정부가 정부 소유 신문에 정간 조치를 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신문 사장 등 경영진은 물론이고 이건혁 편집국장도 물러났다.

새로 공보처장이 된 이철원(1900~1979)은 월탄 박종화(朴鍾和, 1901~1981)를 1949년 6월 15일자로 서울신문 사장으로 임명하고 박종화 사장은 경향신문 편집국장이던 우승규(禹昇圭 1903~1985)를 어렵게 편집국장으로 초빙하고 이사진과 편집진용을 쇄신했다. 우승규는 존경받는 지사(志士)형 언론인이었다. 우승규는 1952년 5월에 편집국장직을 내려놓고 논설위원에 전임했다. 후임 편집국장은 최상덕이란 사람이었는데, 사실상 공석이라서 부국장 겸 정치부장이던 김영상이 편집국장 역할을 했다. 김영상(金永上, 1917 ~2003)은 일제 말기인 1943년에 매일신보에 입사해서 해방 후에 정치부를 담당해 왔다.

6.25 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갈홍기(葛弘基, 1906~1989)를 공보처장으로 임명했다. 갈홍기 처장은 5월 30일자로 고제경을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내려보냈다. 고제경은 부국장 편제를 바꾸어서 정치부장이며 부국장이던 김영상을 반강제적으로 퇴사시켰다. 박종화 사장은 취임 5주년이 되던 54년 6월 사장직을 물러나고 갈홍기 처장은 언론인도 아니고 문필가도 아닌 정동운이란 사람을 사장으로 내려보냈다. 갈홍기와 정동운은 모두 개신교 관련 인사로 이승만 대통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1954년 5월 20일 총선에서 자유당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한 후에 이루어진 이 같은 서울신문 인사는 곧 있을 이승만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개헌을 위한 전초전(前哨戰)이었다.

그 후 서울신문은 멀쩡한 눈으론 보기가 어려운 낯 뜨거운 신문으로 변신했다. 매일매일 이승만을 찬양하고 야당을 비난하는 기사를 썼으니 이승만 장기 집권의 최전선이었다. 1960년 4월 19일, 광화문에 모여든 시위대는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광화문 4거리에 소방서가 있었다. 소방대가 출동했으나 시위군중이 소방대원들을 막아서서 서울신문은 몽땅 타버렸다. 지금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수송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완전히 타버린 서울신문사를 보았다. 불탄 서울신문을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 민심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건혁은 그 후 공보처 공보국장을 지내고 한국일보와 세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김영상은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다가 4.19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됐고 논설위원과 심의실장을 지냈다. 우승규는 그 후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오래 지내고 책도 여러권 펴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