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새벽 재 구속된 윤석열 전 대통령

요즘 윤석열은 물론이고 그 아래에서 검찰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이 서울법대 출신이 대부분인 탓인지 서울법대를 욕하는 사람이 많고 또 그런 논조의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 사실 서울법대 인연이 그렇게 끈끈한 것인지는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나도 잘 몰랐다. 내가 국민의당 국회의원을 지낼 때 서울법대 출신 다선의원으로 국민의당에 참여해서 국회에 진출한 사람으로는 박주선, 김동철, 조배숙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윤석열과 의기투합했다. 서울법대 동문이라는 것 외에는 겹치는 인연이 없는 이들이 윤석열과 함께 하는 것을 보고 서울법대 동문이란 것이 ‘호남과 DJ 정신’을 헌신짝처럼 버릴 만큼 대단한 것인가 하고 나는 감탄(?)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도 서울법대 교수라는 글을 종종 접하게 된다. 10월 유신은 내가 대학 3학년 때인 1972년 가을에 일어났다. 서울법대 교수가 유신헌법을 만드는데 앞장섰다는 이야기는 100% 허위사실이다. 유신헌법은 흔히 ‘한갈이’ 헌법이라고 불렸다. 한태연, 갈봉근, 이후락이 만든 헌법이라는 의미다. 한태연은 1950년대부터 서울법대에서 헌법을 가르친 저명한 헌법학자였다. 5.16 후 3공화국 헌법을 기초하는 데 헌법 교수 몇 명이 참여했는데, 서울대의 한태연, 국민대의 강병두, 경희대의 박일경 교수 등이다.

3공 헌법에 민주적 기본질서 개념과 미국식의 사법심사가 채택된 데는 서독 헌법에 해박한 한태연 교수와 하버드 로스쿨에서 교환학자로 있으면서 미국 대법원을 연구한 강병두 교수의 영향이 있었다. 3공 헌법은 그 준비과정에서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활발한 의견 개진과 토론이 있었고 그 기록이 남아 있다. 한태연 교수는 그 후 공화당 전국구(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어서 서울법대를 떠났다.

내가 대학 2학년이 되던 1971년 봄에 정권 내부에서 헌법을 바꾸는 연구를 하는 대책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급기야는 유기천 교수가 “총통제 개헌 음모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대학을 떠나 버렸다. 1972년 10월 유신 후 일사천리로 개헌이 진행됐는데, 당시는 야인이던 한태연 교수와 중앙대에서 헌법을 담당하던 갈봉근 교수가 참여했고 이들은 그 후 국회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유신 헌법은 서울법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당시 헌법 교수이던 김철수 교수는 새로 펴낸 헌법 교과서가 출판사에서 압수당해 파기되고 본인도 곤욕을 치렀다. 1973년 겨울에는 민법을 가르치던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의문사를 당했다. 그러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10월 유신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대학은 서울 법대였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됐다. 윤석열 자체보다 2021년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만든 ‘공정과 상식’ 관련자들이 더 문제가 아니었을가.. 윤석열에게 ‘별의 순간’이 오는 계기였으니까...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