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모 회장이 지난해 9월 이천 LG인화원에서 열린 사장단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구 회장 옆에 앉은 사람(사진 왼쪽)이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사진=LG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사즉생’이란 표현을 쓰면서 위기경영을 선언하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미국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 앞에서 31조원 현지 투자를 약속하는 등 재계 총수들의 위기 탈출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재계 서열 4위인 LG그룹 구광모 회장이 생존을 걱정하면서 ‘골드 타임’론을 들고나와 재계 전반적으로 위기감이 짙어지고 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위기극복을 위한 임직원의 변화 요구에 앞서 그룹에 만연한 모럴해저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어, 자칫 구 회장의 요구가 말뿐인 구호에 그치지 않겠냐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구 회장은 지난 27일 경기도 이천 LG인화원에서 계열사 경영진 30여 명과 가진 올해 첫 사장단 회의에서 현재 국내외 경제상황의 변동성과 LG그룹이 직면한 위기상황을 강조하고 그룹 전체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구광모 회장, LG의 위기 극복 위해 임직원에게 '변화' 요구
이 날 구 회장은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로서, ‘골드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해, 그룹 전반의 위기상황을 변화로 극복할 것을 주문했다.
구 회장이 이러한 강도높은 위기의식 발언을 뱉어낸 배경에는 현재 그룹 주력 계열사들의 경영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진데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앞으로의 상황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으로 풀이된다.
구 회장은 이날 “일부 사업의 경우, 양적(量的) 성장과 조직 생존 논리에 치중하며 경쟁력이 하락해 기대했던 포트폴리오 고도화의 모습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이런 모습이 그동안의 관성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절박감을 갖고 과거의 관성, 전략과 실행의 불일치를 떨쳐내라”며 “경영진이 주도적으로 대안을 구체화하고 단순히 ‘할 수 있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해야 하는 것’ 중심으로 실체적인 변화를 이끌라”고 주문했다.
현재 LG는 수치상으로 상당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 회장이 취임했던 지난 2018년부터 코로나 시기를 지날 때까지는 비교적 양호한 실적을 냈지만, 지난해부터 석유화학,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그룹 주력 사업의 업황 악화로 그룹 전체 경영실적은 마이너스를 기록할 위기에 처해있다.
■LG그룹사 줄줄이 영업적자, 최악의 영업실적 기록 중
LG그룹의 모회사 격인 LG화학은 지난해 5632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해 2023년 1조8523억원 영업흑자에서 적자 전환했다. 결국 영업이익이 1년 사이에 2조4155억원 줄어든 것이다.
2020년에 LG화학에서 개미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안기면서까지 무리하게 물적분할한 LG에너지솔루션도 지난해 9046억원 영업적자를 기록해 2023년 1조486억원 영업흑자에서 적자 전환했다. 이 회사도 영업이익이 약 2조원 줄어든 것이다.
중국의 추격으로 기술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LG디스플레이는 적자 규모는 줄였지만 여전히 적자행진을 이어갔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5606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는데, 2023년 2조5102억원, 2022년 2조850억원 영업적자를 기록해, 지난 3년 간 영업적자 누계가 5조원을 넘어섰다.
그나마 그룹 주력인 LG전자가 3조419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추세적으로 영업이익 규모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서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는 구광모 회장의 위기 극복 ‘골드 타임’ 발언에 앞서 기업의 고객에 대한 책임과 경영진의 도덕성 회복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직원에게 '변화' 요구하기 전에 경영진 모럴해저드 먼저 해결해야
현재 국회에서 통과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손에 넘겨진 상법개정안이 발의된 원인을 제공한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의 물적분할(속칭 기업 쪼개기)은 수많은 일반 투자자들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상법개정안은 ‘LG화학 방지법’이란 별명이 붙어있다.
2020년 분할한 이후 두 회사 모두 실적과 주가는 곤두박질 쳐서 분할 효과도 보지 못했다. 기업 쪼개기는 구광모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한 후의 첫 번째 중요한 의사결정이었다.
LG화학 주가는 2020년 80만원 대에서 현재 26만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2022년 상장 당시 50만원 대에서 현재 35만대로 크게 떨어져있다.
더 큰 문제는 LG화학이 창업 후 최악의 실적과 주가폭락으로 주주이익을 훼손한 것과는 달리 주요 경영진들은 천문학적인 급여와 상여금을 챙겨가 주주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28일 현재 LG.화학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의 대표이사인 신학철 부회장은 지난해 급여 18억4000만원과 상여금 4억6000만원 등 총 23억원을 챙겨간 것으로 나타났다. 신 부회장 외에도 생명과학사업본부장인 손지웅 사장은 총 15억4700만원, CFO(최고재무책임자)인 차동석 사장은 9억9600만원을 챙겼다.
이 외에도 이사와 감사 등 임원 7명이 총 36억8800만원을 챙겨가 1인당 평균 4억6100만원을 지급받는 등 보수잔치를 연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는 영업감소폭이 1년 새 2조원 이상 줄어들어 563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는데, 최고경영진은 수십억원의 급여에 상여금까지 챙겨간 것이다.
구 회장 집안의 모럴해저드 역시 지적 대상이다. 구본무 전 회장의 맏사위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는 지난해 3월 코스닥 상장사인 메지온에 500억원을 투자한 상황에서 이 회사의 미공개 정보를 아내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에게 제공해 3만주를 취득해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 부부의 재판은 이번달 18일 예정돼있었지만, 재판연기 신청이 받아들여져 다음달 15일로 연기된 상태다.
이런 배경으로 산업계에서는 구 회장이 근본적인 모럴해저드 부분을 수술하지 않고는 구회장이 강조하는 위기극복을 위한 변화 요구는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산업계 관계자는 “구 회장이 그룹이 안고있는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변화의 ‘골드 타임’을 강조하는 심정은 알겠지만, 회사는 최악의 경영실적과 주가폭락을 겪고 있는데 경영자들은 수십억대의 연봉을 챙겨가는 등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어느 직원이 위기 극복을 위해 ‘사즉생’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겠냐”고 지적했다.
이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