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나라 역사에 6.25 이후 5번째 계엄을 선포했다. 사진은 TV화면 캡쳐

탄핵 심판 결과가 몇시간 앞으로 다가 왔다. 작년 연말부터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이 계엄은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주장하더니 점차 계엄이 정당했다는 논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초기에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판사 출신인 나경원 의원과 정치학 교수 출신인 김민전 의원이었다. 이들은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통치행위이며 사법부는 이를 심사할 수 없다는 사법자제론(judicial self-restraint)을 언급했다.

우리는 계엄령을 여러 번 경험했다. 6.25 전란 당시 계엄은 논외로 하고, 그 후 우리가 경험한 계엄은 1961년 5.16, 1964년 6.3 계엄령, 1972년 10월 유신 계엄령, 그리고 1979년 10.26 후 계엄령이 있었다. 그 중 1964년 6.3 계엄령 만이 헌법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계엄이었고, 1961년, 1972년, 그리고 1979년 계엄은 헌정 중단을 가져온 ‘정변(政變)’이었다. 이 중 내가 경험한 계엄은 1964년 6.3 계엄령과 1972년 10월 유신 계엄이었다. 1979년 가을에 나는 유학 중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던 날 나는 동숭동 법대 캠퍼스에 있었다. 오후 늦게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법대 정문으로 들어오면서 계엄이니까 학생들은 집으로 가라고 했다. 1971년 봄 유기천 교수님이 ‘총통제 개헌 음모가 있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대학을 떠난 지 1년 반 만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는 헌정이 중단된 것이니까 그 계엄이 계엄법에 의한 계엄이라고 볼 수는 없다.

1964년 6.3 계엄령 당시 나는 경기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 해 3월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한일 협정 반대를 내걸고 안국동에서 중앙청 정문(지금은 광화문 앞)에서 시청과 종로까지 시위를 벌였다. 당시는 데모를 저지할 수 있는 경찰병력이 태부족해서 시내는 대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학생들만 시위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경기고 등 몇몇 고등학교 학생들도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나섰다. 지금은 정독 도서관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경기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고3 형님들이 학생들을 소집해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그러면서 중학생들은 집으로 가라고 해서 어린 우리들은 인파를 헤치고 집으로 향했다.

혹시 그 당시 사진이 인터넷에 있나 하고 검색했는데, 그 사진을 찾았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경기고 학생들이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는 플래카드를 들고 세종로 거리를 누비는 장면이다. 당시 경기고 3년생이던 손학규가 이 시위를 주도했음은 손학규 선배가 유명해 진후에 알게 됐다. 이 일로 손학규 선배는 징계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 징계인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 여하튼 고 3 때 이런 일을 하고도 손학규 선배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당당히 입학했다.

지금은 비상계엄령 선포 요건이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상황’이지만 당시는 “적의 포위 공격 등 이에 준하는 상황‘이었다. 6월 3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군 병력이 시내에 진입함에 따라 학생 시위는 중단되었다. 계엄은 2~3개월 후 해제됐으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제외한 일체의 집회를 금지한 계엄 포고령을 위반한 사람들은 재판에 회부됐다. 이들은 대리한 변호사들은 당시 상황이 계엄령 선포 요건인 ’적의 포위 공격 또는 이에 준하는 상황‘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계엄선포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이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대법원은 ’적의 포위 공격 또는 이에 준하는 상황‘인지의 여부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요구되는 사안으로 통치행위에 속하며 사법부는 이를 심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행위라는 영역이 있으며 계엄 선포는 통치행위라는 것인데, 이 판결은 김철수 교수 등 헌법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이 시위를 진압하고 질서를 유지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작년 12월 3일에 일어난 사건과는 구분이 된다.

6.3 계엄령은 당시 경찰이 시위를 봉쇄하고 진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왔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그 후 경찰은 시위진압 인력을 확충하고 장비를 도입해서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초에는 페퍼포그를 발사하는 장갑차가 시위현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나온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라는 슬로건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5,16의 슬로건이었는데, 이를 본 서울의 식자층은 북한을 연상하곤 했다. 실제로 1963년 10월 대선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좌익이라는 보도를 했고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를 용공이라면서 색깔론을 내세웠다. 5.16 후 군정기간 동안에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교수형을 당하고 북에서 서울로 내려온 황태성이 총살형을 당한 사건은 당시 복잡했던 사정이 반영됐다고 하겠다. 1963년 대선에서 6.25 때 공산군 치하에서 100일 동안 공포의 세월을 보낸 서울 시민들이 윤보선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하겠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