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통령제가 문제가 많으며 ‘1987년 체제’가 수명을 다 했기 때문에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지난 20대 국회에선 그러 취지에서 개헌특위를 가동했으나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윤석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틴핵심판을 앞두고 전직 국회의장 등 원로들이 개헌을 논의했는데, 역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헌재의 결정이 인용으로 나온다면 개헌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며, 그것이 기각으로 나온다면 개헌 같은 한가한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닐 것이다.

정치 원로들이 제기하는 개헌론을 보면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의회와 협력을 하도록 하는 분권형 정부를 만들자는 것이고, 둘째는 5년 단임제 대통령은 폐단이 많기 때문에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우선 이른바 분권형 정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주적 정부는 의원내각제이거나 대통령제이지만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제도도 있는데, 그것을 흔히 이원적(二元的) 정부라고 부른다. 1차대전 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그런 제도를 택해서 1925년에 힌덴부르크 장군이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바이마르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가비상권과 국군 통수권을 부여했는데, 의회 정치가 극심한 혼란과 대립을 초래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비상대권을 통해 통치하더니 결국에는 나치당 집권을 초래해서 헌정은 중단되고 말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같은 정부 형태는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줄 알았는데, 1958년 프랑스 드골 헌법이 그와 유사한 정부 구조를 택했다. 직선 대통령과 의회정부제를 결합시킨 프랑스 헌법 체제하에서 의회의 다수당과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다르면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드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드골파가 의회도 장악해서 드골은 강력한 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 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 집권 시에 반대파가 의회의 다수당을 차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노회(老獪)한 정치인인 미테랑과 시라크는 그런 상황을 ‘동거(同居)정부’라는 협력체제로 이끌어 갔다. 구조적 취약점을 정치로 극복한 셈이다.

대통령이 속한 정당과 의회의 다수당이 다른 경우는 ‘견제와 균형’을 근간으로 하는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선 자주 발생한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 12년 동안 예산권을 갖고 있는 하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었으나 레이건과 부시는 의회와 협력해서 국정을 원만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의회의 다수당도 공화당인 지금의 트럼프 정부의 행태와는 180도 달랐다. 그러니까 레이건과 부시 시절에는 ‘견제와 균형’이 아름답게 작동했던 것이다. 결국 제도 보다는 운영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0대 국회 개헌특위 논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정부구도는 분권형 정부,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이다. 국민 직선의 대통령과 의회 다수세력이 내각을 구성하는 오스트리아와 핀란드를 흔히 분권형 정부라고 지칭하는데, 두 나라의 실제를 보면 의원내각제이면서 직선으로 선출하는 대통령에게 몇 가지 권한을 주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실질은 의원내각제와 다를 것이 없다. 오스트리아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고 그 임기는 6년이며 연임이 가능하고 국민소환으로 해임이 가능하다. 대통령 궐위 시에는 선거로 후임을 선출한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권한은 대부분 의례적인 것이며 사면권 등 몇 가지 고유권한이 있으나 이 역시 실제로는 내각과 협의를 하게 된다.

핀란드도 대통령을 직선으로 선출하는데, 임기는 6년이고 단임이다. 핀란드 대통령은 원래 간선으로 선출했으나 1994년부터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핀란드 의회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통상적으로 의회 다수석을 구성하는 정당 연합이 내각을 구성한다. 핀란드 대통령의 권한은 대체로 의례적인 것이나 외교 안보에서 권한을 갖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핀란드 헌법은 대통령이 의회와 함께 대외정책을 담당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대외정책이 지나치게 파당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견제하도록 했다. 또한 핀란드 대통령은 장관과 협의하여 군사적 명령에 관한 결정을 하며 법률에 의거해서 군 인사권을 행사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핀란드 대통령은 군 통수권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는 대통령은 총리와 국방장관과 협력해서 이 같은 권한을 행사하지만 대통령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핀란드는 과거에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외교 안보 문제는 의회의 다수세력 외에도 대통령이 함께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핀란드와 같은 정부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바로 4.19 후에 들어선 민주당 정부에서였다. 4.19 혁명 후 1960년 6월에 개정된 헌법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의례적 권한을 갖도록 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고, 4.19 후 민주당 신파는 장면 박사를 총리로 선출하는데 성공했고 민주당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자유당이 궤멸한 가운데 민주당 의원과 무소속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는 민주당의 독무대였지만 총리 선출과 조각(組閣)을 두고 신파와 구파로 갈라졌고 그런 탓에 개각이 빈번했다. 국방부장관은 신파이며 장면 총리와 가까웠던 현석호 의원이 잠시 하다가 구파 배려로 권중돈 의원이 반년 정도 하다가 구파가 민주당 신파와 결별한 후에 현석호가 다시 맡아오다가 5.16이 발발했다. 군 경력이 없었던 정치인 권중돈과 현석호는 군을 장악하기는커녕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5.16을 맞은 셈이다. (5.16 세력은 정치정화법을 만들어서 민주당 신파 정치인들은 정치 참여를 배제하고 1963년에 대선과 총선을 치러서 공화당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1960년 2공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의례적 권한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2공 헌법 제61조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고 규정했다. 순수한 의원내각제 정부라면 국군 통수권도 내각이 가져야 함에도 1공화국 이승만 헌법 조항을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군정권(軍政權)은 내각이 갖고 군령권(軍令權)은 대통령이 갖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국군통수권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갖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간에 이런 구도 하에서는 대통령도 총리도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그리고 현석호/권중돈 국방장관 중 어느 누구도 군에 복무한 경험이 없었고 군을 알지도 못해서 이들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16이 났을 때 최초 계엄 포고령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나왔으나 장 총리와 윤 대통령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반응이 애매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장도영은 곧 밀려났을 뿐더러 5.16 세력에 의해 ‘반(反)혁명’으로 몰려서 고생을 했다.

만일에 2공화국 헌법이 대통령이 아닌 내각에게 국군 통수권을 주었거나, 또는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사이가 좋았다면 아마도 우리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주한 미국 대사가 장면 총리에게 군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저지하라고 했음에도 장면 총리는 피신을 하는데 급급했다. 장 총리는 자신이 국군 통수권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며 국군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와 가까운 현석호 국방장관과 소통이 없었을 것이니, 허울뿐인 국군 통수권자였다. 민주당 정부가 5.16으로 허무하게 무너진 데는 군 통수권이 ‘분권화’되어 있었던 것도 일조(一助)를 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비슷한 헌법 구도였으나 독일 바이마르 정부에선 군 통수권과 비상대권을 가진 대통령의 독재가 총통제 정부를 초래했고, 우리나라 민주당 정부에선 군령권과 군정권이 분리되더니 정부가 소수의 군 병력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같은 헌법 구조를 갖고 있는 핀란드에선 군 통수권 문제가 이슈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핀란드가 인구가 적고 동질성이 강한 부유한 민주국가이기 때문이지 제도 때문은 아닐 것이다. 또한 분권형 정부를 한다면서 대통령을 4년 중임제로 하자는 주장도 그 논거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분권형 정부는 기본적으로 의원내각제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임기나 중임 가능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