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차기 총재로 지목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자민당 총재. 사진=본인의 인스타그램
차기 일본 총리로 예정된 사나에 타카이치는 1961년 생이니까 대학 입학이 1979년이나 1980년이 될 것이다. 와세다와 케이오에 합격했으나 부모가 외지에서 사립대학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코베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타카이치가 대학을 다닌 1980년대 일본 경제는 최고 수준이었고 일본 산업의 경쟁력은 세계 1위였다. 마스시다 정경숙을 마친 타카이치는 1987년부터 89년까지 미국 하원의원 패트리셔 슈레더(Patricia Schroeder)의 사무실에서 펠로우를 지냈다. 슈레더는 당시에는 많지 않은 여성의원으로 민주당 소속이고, 1984년 대선 때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도 거론됐던 진보적 성향이었다. 아마도 타카이치는 여성 다선 의원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서 슈레더 의원 사무실에 지원하지 않았을까 한다.
타카이치가 워싱턴에 머물고 있을 때는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의 전성기였고 영국은 마가릿 대처 총리의 전성기로, 두 나라는 모두 경기침체에서 벗어난 후였다. 1987년 6월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 브란덴브르크 게이트 앞에서 고르바쵸프 서기장을 향해 ‘이 문을 열고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기염을 토했으니까, 타카이치 역시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유세계가 승리를 이룩한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는 혼돈의 1960~7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와는 다르다. (우리나라만 예외..)
타카이치는 헤비메탈 음악을 좋아하고 모터사이클을 좋아해서 지금도 가와사키 400cc를 갖고 있다고 한다. 모터사이클과 헤비메탈 음악이라면 1969년에 나온 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가 연상된다. 일본에서도 1970년대 들어서는 모터사이클이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고, 혼다, 야마하, 가와사키 등 메이커들은 고성능 모터사이클을 출시했다. 그러면서 혼다 등 메이커들은 1000cc급 헤비 모터사이클을 만들어서 미국 시장에 팔았다.
일본에선 도로교통법으로 탈 수 없는 헤비 모터사이클이 대량으로 미국에 수입돼서 할리 데이비즌 매출이 폭락하자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산 헤비 모터사이클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피해구제) 조치를 가해서 통상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 록 음악도 헤비메탈이 성행했으나 나 같이 고등학교 시절에 유행했던 팝 뮤직에 길들여진 세대는 크리덴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블(CCR)이나 이글스(Eagles) 같은 수준에 머물고 하드록이나 메탈릭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사나에 타카이치는 20대에 1970~80년대 미국 대중문화와 레이건-대처 정치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일본 자민당 정치인들과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
<Easy Rider>는 우리나라 상영관에 들어 온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 내용이 1970년대 한국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피터 폰다가 제작하고 데니스 호퍼가 감독을 하고 두 사람이 주연을 한 이 영화는 20세기의 주목할 만한 영화의 하나로 꼽히며, 상업적으로도 대단히 성공했다. 1969년 여름에는 <Easy Rider>가 나오고 뉴욕 북부에선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렸다. ‘반문화(Counter-Culture)’가 피크를 찍은 여름이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헤비 모터사이클 유행을 부추겨서 혼다, 가와사키 등 일본 메이커들이 성공하는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