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 표결 결과를 기다리는 대표단. 장면, 조병옥,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등
나는 장면(張勉, 1899~1966) 박사가 우리나라 역대 정치인 중에서 가장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당의 이승만,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날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 있으나 오늘날 민주당은 신익희, 조병옥, 장면의 민주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장면은 5.16 때 수녀원에 숨어서 군사정변을 용인한 총리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장면은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 총회에서 신생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으려 할 때 파리에 파견된 우리 대표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12월 12일 유엔총회는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한국의 유엔 승인이 담긴 결의안 제195호를 통과시켰다. 사진은 표결 결과가 나오기 직전에 긴장해 있는 우리 대표단의 모습이다. 가운데 장면 박사, 왼쪽에 조병옥 박사, 그리고 조병옥 박사 뒤에 국회의원으로 대표단에 합류한 정일형(鄭一亨, 1904~1982) 박사가 보인다. 그리고 모윤숙과 김활란이 뒷좌석에 앉아 있다. 장면, 조병옥, 정일형은 모두 미국 대학에서 공부해서 영어에 능통했다. (통역이 없으면 아무 말도 못하는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조병옥과 정일형은 대학원에서 논문을 써서 받은 박사이고, 장면은 모교 맨해튼 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다. 장면은 그 후 두 개의 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추가로 받았다. 4.19 후 민주당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하게 되는 정일형은 헌정회 회장 정대철 전 의원의 부친이다.
파리 회의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승인을 받아서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 세력을 젖히고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의 능력을 높이 사서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했다. 뉴욕 시내에 있는 작은 가톨릭 대학인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학과 종교를 공부한 장면은 외교관례나 국제법을 잘 몰랐다. 혼자 부임한 장면은 사무실을 구하고 대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워싱턴에 있는 다른 나라 대사한테 물어서 공부를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장면은 대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대사관을 간신히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6.25가 발생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워싱턴 시간으로 6월 25일 밤, UPI 기자가 처음을 전화를 했고,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대통령은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처들어 오고 있다면서 속히 미국 정부와 유엔에 호소하는 활동을 하라면서, 조국의 운명이 장 대사에 달려 있다고 황망하게 부탁했다. 장면은 즉시 국무부에 연락하고 우방국가 대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고향 미주리에서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루먼 대통령을 딘 애치슨 국무장관과 함께 블레어 하우스로 찾아갔다. (당시 백악관은 수리 중이라서 대통령은 블레어 하우스에 머물렀다.)
본국과는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아서 장면 대사는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야만 했다. 다행히 미 국무부가 신속하게 노력해서 유엔안보이사회가 소집되었고, 소련이 중공의 대표권 문제를 이유로 결석 중임을 이용해서 6월 27일 미국은 신속하게 북한을 규탄하고 유엔군 파병을 위한 결의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사진 (2)는 안보이사회에서 발언하는 장면 대사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한 며칠이었다. 유엔군 참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23일자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총리로서 장면은 파리에서 열린 6차 유엔총회에 대표로 참석했으나 6차 총회에서 한국은 의제에 오르지 못했고 장면은 지병이던 간염이 악화해서 현지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귀국 후에도 리지웨이 장군의 호의로 부산에 있는 미군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장면은 신병을 이유로 52년 4월 총리직을 사임했다.
장면이 명목뿐인 총리직을 그만둘 즈음 이승만 측근들이 추진한 직선제 개헌안으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당시 국회에는 무소속 의원들이 많았고 6.25에 대비하지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인기가 없었고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여론이 좋지 않았다. 5월 9일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방위군과 거창 사건을 책임지고 사임하라고 촉구하면서 자신이 먼저 사임했다. 국회는 후임 부통령으로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를 선출했다. 자유당이 부통령으로 밀었던 이갑성(李甲成, 1889~1981)은 큰 차이로 패배했다. 이런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당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때 장면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인지 간염으로 입원 중인 장면을 둘러싼 음해성 유언비어가 많이 돌았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장면은 이승만의 애국심은 의심할 바 없으나 자존심이 너무 커서 자기 외에는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또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국회이건 헌법위원회이건 필요없다고 보고 또 장기집권을 위해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고 적었다.
1952년 7월 4일 밤 불법적인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에 들어가서 출석 166명, 가 163명, 기권 3명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렇게 해서 2대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게 됐는데, 자유당에서는 독립군 출신으로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을 부통령 후보로 내는 듯하더니 막판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 함태영(咸台永, 1872~1964)을 후보로 지명했다. 함태영은 자신이 이미 80세를 넘었다고 사양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강권해서 수락했다. 이승만 보다 나이가 많은 함태영이 부통령이 된 데 대해 장면은 “이 이면에는 별별 추잡한 얘기가 많다”고 회고록에 썼다. (함태영의 막내아들이 아웅산에서 순직한 함병춘 전 주미 대사다.)
장면은 1956년 대선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다. 민주당 후보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가 호남 유세 중 열차에서 급서(急逝)해서 민주당은 정권 교체 기회를 놓쳤으나 장면은 부통령에 당선됐다. 장면은 자유당 정부의 1호 감시대상이 되는 부통령을 지내야 했다. 국회 행사에 가도 부통령이 참석했다는 발표도 없고 자리도 마련되지 않은 치사한 세월이었다. 장면은 부통령이 ‘죄 없는 죄인’이라고 회고록에 썼다. 장면이 부통령에 취임한 날은 1956년 8월 15일이었다. 부통령 취임 후 한달 반이 지난 9월 29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공관에서 열렸고 장면도 당연히 참석했다. 그때 단상에 오른 장면을 향해 괴한이 권총을 발사했다. 장면은 왼손에 관통상을 입었다.(사진 3)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조병옥 만세’를 불렀다. 마치 배후가 민주당 구파라고 생각게 하기 위한 쇼였다. 범인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장면이 감형을 탄원해서 무기로 감형됐고 장면은 교도소로 범인을 찾아가서 그를 용서했다. 범인은 장면을 정면으로 쏠 수 있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왼손의 상처를 치료한 장면은 부통령 관저에 쉬고 있는데,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이 찾아왔다. 장면은 이기붕에게 “여보시오, 정치라는 것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요 ?”라고 하자, 이기붕은 “장 박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라고 했으나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고 장면은 나중에 회고록에 남겼다.
정치가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리더십은 해방과 건국 및 정부 수립과 유엔 승인, 그리고 6.25 후 미국에 대한 신속한 지원 요청까지인 듯하다. 흔히 이승만을 “외교에는 천재, 인사에는 바보”라고 불렀는데, 이승만 인사의 성공 케이스는 장면을 주미 대사로 임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