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무역협상 관련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지난 12일 워싱턴에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회담을 가졌지만 별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6.25 한국전쟁 이후 75년간 가장 중요한 동맹관계였던 미국이 우리나라 경제의 최대 악재로 등장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칼춤이 우리나라를 집중 겨냥하고 있고, 그 미국을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지난 4월 일방적으로 정한 25%의 상호관세를 15%로 낮춰주는 대신 3500억달러 대미 투자를 요구했고, 투자계획서에 서명하기를 재촉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투자계획서의 주요 내용은 3500억달러에 대해 투자처나 투자방식은 모두 트럼프 대통령 마음대로 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은 전혀 개입이나 참견을 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투자 시점도 투자계획서에 서명한 날로부터 45일 이내에 한국과 미국이 합작해서 만든 SPC(특수목적법인)에 3500억달러를 직접 입금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3500억달러는 8월 말 기준 대한민국 외환보유고 4163억달러의 84%에 해당하는 규모다. 만일 한미 합작 SPC에 서명을 하고 45일 만에 3500억달러를 입금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663억달러가 된다. 외국인 투자자 일부만 빠져나가도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혹독한 국가부도 사태를 맞게 될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하기도 어려운 ‘설마’ 하는 시나리오는 실제 한미 무역협상의 핵심인 투자계획서에 서명하는 순간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투자처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속셈은 투자 대상이 미국의 가장 힘든 곳에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무너져가고 있는 인텔 등 반도체 제조능력을 키우는데 쓴다든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조선산업, 새롭게 재개한 원자력발전소 재건, 제조기반이 무너진 의약·바이오 분야를 살리는 데 쓸 것으로 보인다.

말로는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는 이익금을 한국과 미국이 50%씩 가져가고, 투자금 회수 이후에는 미국이 이익의 90%를 가져간다고 하지만, 투자처라는 곳이 열악한 분야들이기 때문에 이익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결국 투자금을 모두 날리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일본과 맺은 투자계획서를 거론하면서 한국도 서명에 나서라고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정확한 서명 내용이 밝혀져 있지 않은 상황이고, 일본과 한국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측면에서 일본 보다는 한국의 리스크가 훨씬 크다.

일본은 55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일본 외환보유액 1조3242억달러(2025년 8월말 기준)의 41.5%로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충격이 훨씬 덜하다. 거기에 일본은 기축통화국 중 하나다. 즉 엔화를 담보로 달러를 상당부분 쓸 수 있는 국제 통용 화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미국과 상호 무제한 통화스와프 대상국으로 지정돼있어서, 외환보유고 불안이 전혀 없다.

반면, 우리나라는 비 기축통화국이면서 미국의 제한된 통화스와프 대상국에서도 빠져있어서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면 그대로 국가부도사태를 맞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에게 무제한 통화스와프 대상국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해놓은 상태지만 미국은 답을 주지 않고 있다. 미국이 원화의 글로벌 가치를 불안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고 나서 우리나라가 원화를 미국에 맡기고 달러를 쓸 때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환손실을 입게 된다는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하고 돌아왔지만, 빈손으로 알려졌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할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섣불리 언론에 상황을 중개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바람직한 태도다.

지난 7월 말 백악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 무역협상 대표단들이 무용담을 떠벌린 태도가 우리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이제 깨달았을까? 당시 우리 대표단은 최고의 성과를 냈다느니, 조선 산업을 앞세운 마스가(MASGA)가 통했다느니, 쌀과 소고기 시장은 막았다느니 등등 자화자찬을 늘어놓아 미국을 자극했다.

어느 나라도 미국과의 협상 과정이나 결과를 성과로 내세운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참으로 이례적이었고, 입이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었다.

3500억달러 투자에 대해서도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8월 3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3500억달러 투자펀드 조성은 현금을 미국에 주는 것이 아니라 보증한도를 설정해 대출형식으로 조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직접 투자를 요구하는 트럼프 측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 발언으로, 이 역시 투자방식이 확정되지 않은 설익은 상태에서 미국 측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에서 “국익에 방해가 되는 결정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발언 역시 미국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 발언 직후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투자계획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상호관세를 25%로 다시 돌려놓겠다고 압박하고 나섰다.

그 전에 한미 무역협상단의 무용담이나 앞서가는 발언이 없었다면, 대통령의 ‘국익 우선’ 발언은협상의 유리한 카드를 쥐는 계기가 될 수 있었겠지만, 협상 중계하듯 아는체하는 장관들과 관계자들의 입방정으로 대통령의 소신 발언마저 빛을 발하고 공격의 대상이 됐다.

미국의 말도 안되는 겁박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 싱크탱크 중 하나인 CEPR의 딘 베이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정부의 미국에 대한 3500억달러 투자는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결정이며, 한국과 일본이 합의를 수용한 것은 신을 모독할 정도로 어리석은 것이다”고 비난했다.

아예 25% 상호관세를 맞고, 투자할 돈 3500억달러를 국내 기업들을 지원하는 데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미 수출 관세 25%를 맞을 경우 추가되는 무역감소가 연간 120억달러 정도라는 계산도 나왔다. 120억달러는 수출 감소 총량으로 이 중 이익만 떼서 보면 연간 10억달러 전후가 될 것이다. 3500억달러는 10억달러의 350배다. 350년 간의 손실에 해당 된다는 단순 계산이다.

외환보유고도 지키면서 3500억달러를 대한민국 자강(自强) 기반을 만드는데 쓰자는 데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협상이 9월을 넘기면서 막바지에 이르렀다. 다음달이면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가 경주에서 열린다. 트럼프도 올 예정이고 미중무역협상 막바지에 있는 중국의 시진핑도 올 가능성이 있다.

우리도 다급하지만 미국이 더 다급할 수 있다. 급할수록 돌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미국은 그럴 입장이 아니다. 이 대통령의 ‘국익 우선론’을 지키면서 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