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6일부터 파리에서 개최 중인 제3차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 대한민국 승인 문제로 특사로 참석한 우리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김동성, 장면, 조병옥, 뒷줄 왼쪽 남궁염, 뒷줄 오른쪽 모윤숙.
1948년 12월 6일부터 파리에서 개최 중인 제3차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선 대한민국 승인 문제가 의제로 올라왔다. 아래 사진은 유엔 총회에 특사로 파견된 우리 대표단장 장면 박사와 조병옥 고문 그리고 대표단 사진이다. (뒤에 시인 모윤숙이 앉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말기에 친일 행각이 많았던 모윤숙을 이렇게 챙긴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한국의 유엔 승인이 담긴 결의안 제195호를 통과시켰다. 반대 6표는 모두 공산권 국가들이었다. 유엔총회 결의 제195호 제2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하였으며 또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지역에 대해 실효적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과, 동 정부는 한국의 동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이자 임시위원단에 의해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또한 동 정부가 한국내의 유일한 정부라는 것을 선언한다." 우리 대표단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는 표현을 원했으나 그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다소 애매한 표현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의원인 장면(張勉)을 수석대표로 한 대표단을 꾸렸고 대통령 특사인 조병옥이 합류하도록 했다. 조병옥은 이승만 정부에서 국방장관이나 내무장관을 맡기를 원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이 부담스러워서 다른 자리를 제안했으나 조병옥이 그것을 거절해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했다. 장면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가톨릭 대학인 맨해튼 칼리지를 나왔고, 조병옥은 역시 맨해튼에 있는 명문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장면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바티칸이 움직였고 그 덕분에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이 우리를 일찍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1949년 12월, 장면의 외교적 능력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을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했다. 장면 대사는 빈 손으로 워싱턴에 우리 대사관을 열어야 했다. 6.25가 발발하자 장면 대사는 애치슨 국무장관과 함께 트루먼 대통령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내가 그 x자식들 엉덩이를 걷어 찰거야”면서, 장면의 어깨를 두드렸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아래 사진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있는 사람은 언론인으로 초대 공보처장이던 김동성(金東成 1890~1969)이고 뒷줄 왼쪽에 남궁염(南宮炎 1888~1961)이 보인다. 남궁염은 1949년 4월부터 1960년 6월까지 11년 동안 뉴욕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를 지냈다. 재미 교포인 남궁염은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가서 한국 대표단에 합류한 듯하다. 구한말에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에서 공부하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든 애국지사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의 아들인 남궁염은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을사늑약이 맺어진 후 박영효(朴泳孝)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버지니아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다. 그러던 중 이승만을 만났고, 이승만은 남궁억의 아들인 남궁염을 신뢰했다. 뉴욕에 정착한 남궁염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남궁염을 뉴욕주재 총영사로 임명하면서 한 푼도 못 보내 준다고 했다고 한다. 남궁염 영사는 교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맨손으로 영사관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지만 장면은 1년 만에 건강상 이유로 사퇴했고, 부산 정치 파동을 본 후에는 이승만에게 크게 실망하게 된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을 내무장관에 임명하며 조병옥은 경찰병력을 이끌고 대구에 머물면서 국군과 대구시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하지만 조병옥도 부산 정치 파동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실망해서 야당인 민국당 후보로 1954년 총선에서 대구에서 당선되어 야당의 거물로 등장했다. 조병옥과 장면 그리고 신익희는 1955년에 통합야당 민주당을 창당해서 지유당 정권에 맞서게 된다.(1955년 민주당은 지금 민주당과는 전혀 다른 정당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4.19 민주혁명이 발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하자 남궁염 총영사는 사표를 내고 은퇴했다. 남궁염은 하와이로 망명해 온 이승만을 만나고 싶어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1년 11월 사망했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격동의 시절을 살았던 큰 인물들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