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두코바니 원자력발전소. 사진=한국수력원자력
체코원전 수주를 둘러싼 그동안의 여러 의혹들이 결국 웨스팅하우스의 벽을 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산업과 관련한 비즈니스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쟁점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를 둘러싸고 지식재산권 싸움을 벌이던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미국 웨스팅하우스 간의 구체적인 계약 조건이 밝혀지면서 완벽한 불평등계약이란 비난이 일면서, 윤석열 정부가 지지율 만회를 위해 무리해서 해외 원전 수주를 밀어붙인 것 아니냐는 정치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알려진 계약 내용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원전 산업은 거의 웨스팅하우스의 식민지가 된 모양새다.
한수원이 해외에서 원전을 수주할 때 원전 1기(약 1000MW)당 6억5000만달러(약 9000억원)의 물품 및 용역 구매와 1억7500만달러(약 2400억원)의 기술사용료를 웨스팅하우스와 계약하고 지불하고, 우리가 수주한 체코와 사우디 지역의 원전 연료는 웨스팅하우스가 100%를, 그 외의 지역 원전에도 50%의 연료를 공급하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형 소형원전이라고 홍보해온 SMR(소형모듈원자로) 등 차세대 원전 수출 시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자립 검증을 통과하도록 했다.
이들 계약이 이행되지 않을 때는 은행의 보증 신용장을 원전 1기 당 4억달러를 발행하는 조건도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까지는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것이지만, 영업 대상국에 대해서도 종속관계로 들어갔다.
우리나라는 동남아 필리핀, 베트남,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이집트, 남아프리카 전체, 남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중동 요르단, 터키,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돼있다.
웨스팅하우스는 북미 전체, 체코를 제외한 EU(유럽연합),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등에서 독점적으로 영업을 하고, 이들 지역에서 대한민국은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들 계약 효력 기간을 향후 50년까지로 합의했다고 하니, 거의 두 세대에 걸쳐 원자력발전소 식민지 시대를 겪어야 할 판이다. 일제 36년보다 14년이나 긴 기간이다.
명백히 불평등한 노예계약이라고 할 만하다.
이번 불평등 계약은 이미 예고돼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와 한수원, 한전 등이 초기부터 너무 쉽게 수주전에 나선 것이 발등을 찍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체코원전 수주전에 나서면서 한수원은 그간 2002년 개발한 APR1400이 원자로냉각재펌프(RCP)·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원전설계핵심코드 등 핵심 기술을 국산화했다는 점에서 독자 수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주장하는 한국형 원자로 기술의 토대가 웨스팅하우스의 원전기술인 ‘SYSTEM80’, ‘SYSTEM80+’를 바탕에 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결국 이 원천기술 지식재산권 싸움에서 밀리면서 SMR의 기술 독립성도 무너지고, 영업 국가의 영역도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가 원전건설 확대 정책을 펴면서 죽어가던 웨스팅하우스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도 우리에게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미국의 AI기업들의 전기수요가 급증하면서 1979년 쓰리마일섬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신규 건설이 중단된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재개되면서 웨스팅하우스 일감이 늘게 됐다.
미국은 1979년 쓰리마일섬원자력발전소 2호기가 가동 4개월 만에 냉각수가 유출되고 연료봉이 녹으면서 방사능이 유출되자 2호기를 폐쇄시키고, 신규 원전 건설을 전면 중단한 바 있다. 나머지 1호기는 2019년까지 운영하다가 적자가 지속되자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는데,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전기 공급계약을 체결하면서 다시 가동하기로 하는 등 미국 내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지난 5월 트럼프는 원전 재개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원천기술을 가진 웨스팅하우스에게는 AI시대와 트럼프 당선이 호재로 작용하면서 협상력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웨스팅하우스 뒤에는 자국 이익만 따지는 미국 트럼프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남의 나라 밥상에 대해서도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온갖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는 트럼프가 자신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 관련해서 얼마나 큰 것을 요구할 지는 안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지난 1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맺은 협약은 미밀유지협약 조건인데, 이 내용이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고 정치적으로까지 쟁점화되면서 웨스팅하우스와 트럼프에게는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건설을 추진중인 원전이 430기 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세계 원전 시장은 러시아와 중국이 50%를, 프랑스가 약 15%, 나머지 35%를 한국과 미국이 수주하는 구도로 돼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미국이 원팀이 돼서 러시아와 중국의 아성을 무너트려야 하는데, 서로 다투게 될 경우 경쟁력은 더욱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싸고 맺은 웨스팅하우스와의 종속 계약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지만, 이 내용이 글로벌 시장에 그대로 알려진 것은 더 큰 리스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체코 원전 수주 초기부터 웨스팅하우스와 협력관계를 가져갔다면 불평등 계약은 없었을 것인데 서둘러 성과를 보이다가 그런 불평등 계약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호 협약대로 비밀유지를 하면서 조정을 해나갔다면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수원이나 한전이 해외 원전 시장에 어떤 내용의 제안서로 수주전에 나설 지 참으로 갑갑하게 됐다. 비즈니스의 생명은 신뢰인데 한국의 밑천이 다 드러났으니 어떤 전략으로 우리의 강점을 보여줄 지…
이 사태를 정치적인 쟁점으로 키워서 문제를 확산 시킬수록 피해는 결국 앞으로 수주전에 나설 이재명 정부를 비롯해 차기 정부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풀어낼 문제가 절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유리한 지를 따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