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잭슨 상원의원의 30년 보좌관인 도로시가 펴낸 책 표지
요즘 국회의원 보좌관을 둘러싸고 말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국회의원 보좌진을 시작으로 해서 국회의원이 된 경우가 꽤 있다. 미국도 의원 보좌진을 하다가 정부 정무직이나 선출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로버트 케네디는 매카시가 1953년에 상원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 그 위원회의 법무 보좌역을 지냈을 뿐이다.
1980년대 초까지 미국 상원에는 한 상원의원의 보좌관을 30년 동안 지낸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는데, 도로시 포스딕(Dorothy Fosdick 1913~1997)이란 국제정치학자다. 도로시 포스딕은 타임지의 표지에도 나온 저명한 진보적 신학자의 딸로 태어나서 스미스 대학을 나오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1939년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라인홀드 니버를 추종한 포스딕은 모교 스미스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1942년부터는 국무부 정책기획실에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조지 캐년 등을 모시고 일했다. 도로시는 여성으로서 이례적으로 일찍이 국무부 핵심부서에서 일을 한 셈이다. 아이젠하워 정부가 들어서자 국무부를 나온 도로시는 자기와 동년배인 민주당 초선 상원의원 헨리 잭슨을 만났다. 헨리 잭슨과 도로시 포스딕은 금방 서로를 좋아하게 됐고, 1955년에 도로시는 잭슨 의원의 대외관계를 다루는 보좌관이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도로시 포스딕은 잭슨 의원이 1983년에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잭슨 의원의 보좌관으로 거의 30년 동안 일했다.
헨리 M. 잭슨(Henry M. Jackson 1912~1983)은 워싱턴주 시애틀 근교에서 노르웨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스탠포드 대학과 워싱턴대학 로스쿨을 나와 검사를 하다가 1941년부터 하원의원을, 1953년부터 1983년에 사망하기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1982년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상원의원 6선을 기록했으나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에 격추된 날 소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몇 시간 후 급작스런 심혈관 파열로 사망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생각이 많았던 잭슨 의원의 때 이른 사망을 애도하고 민간인에 부여하는 최고훈장인 자유메달을 추서했다.
잭슨 의원은 1960년대 개혁입법인 민권법에 찬성했고, 에드먼드 머스키(Edmund Muskie 1914~1996) 상원의원과 함께 국가환경정책법(NEPA)을 발의해서 통과시켰다. 1970년대에 잭슨은 환경자원을 관장하는 상원 내무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많은 환경 법률이 제정되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공산권에 대한 강경론자인 잭슨은 국방력 증강을 지지했다. 그는 국방부의 군비(軍備) 확장을 열렬히 지지했던 의원 중 한명이었는데, 워싱턴 주에 폭격기와 미사일을 만들던 보잉사가 있어서 ‘보잉의 상원의원’(Senator from Boeing)이란 말까지 들었다. 잭슨이 사망한 후 미 국방부는 잭슨기념재단에 이례적으로 거액을 기부했으니, 그와 국방부 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 상공에 이따금 나타나는 B-1 폭격기는 잭슨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서 개발된 것이다. 그는 민권 등 국내문제에는 진보적이면서도 국방안보에는 보수적이던, 이제는 사라진 ‘냉전 진보’(Cold War Liberal)이었다. 1976년 대선을 앞두고 잭슨은 민주당 후보로 선두주자였지만 공산권에 대한 강경한 입장 때문에 당내 진보파의 반대에 봉착해서 프라이머리에서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다.
잭슨 의원이 1970년대에 남긴 중요한 법안은 1974년에 통과된 잭슨-배니크 수정법 (Jackson-Vanik Amendment)이라고 부르는 통상협정법 수정이다. 1960년대 말부터 소련은 출국을 원하는 유태인의 해외이민을 허용했는데, 지망자가 늘자 소련당국은 고액의 출국세를 부과했다. 이에 대해 미국내 유태인들의 여론이 비등하자 당시 전략무기제한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잭슨 의원은 소련과 같은 비(非)시장 경제국가가 해외이주를 제한하면 최혜국대우를 유예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당시는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과 교역확대 등 데땅트(detente 解氷)를 추구할 때였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하원법안이 배니크 의원에 의해 발의되고 유대인들이 법안 통과를 열렬히 로비하고 인권단체들도 지지함에 따라 하원을 통과하고 상원 통과를 앞두게 되자 닉슨 대통령은 소련과의 협상을 저해한다면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닉슨이 사임하고 포드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키신저 장관과 잭슨 의원이 약간의 타협을 거쳐 최종적으로 의회를 통과했고 포드 대통령은 이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철의 장막’ 속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를 하게 됐다. 소련을 향한 잭슨 의원의 투쟁은 노벨상 수상자 솔제니친의 워싱턴 방문, 헬싱키 협정 등 일련의 사건을 두고 이어져갔다.
잭슨 의원의 이러한 행보의 막후에는 막강한 브레인인 도로시 포스딕이 있었다. 잭슨 의원은 상원 국방안보 관련 위원회의 위원장을 오랫동안 맡고 있어서 포스딕은 그러한 위원회의 보좌역을 지냈다. 따라서 국무부 관리들과 펜타곤의 장성들은 그들이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선 도로시 포스딕을 먼저 설득해야만 했다. 국방안보 문제를 상원에서 오랫동안 다루어 온 그녀는 그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였다. 잭슨 의원의 의원실에는 국가안보를 전공한 젊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도로시 포스딕 아래서 일을 했다. 레이건 1기에 유엔 주재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은 잭슨 의원실에서 일한 후에 조지타운대 교수를 지내다가 레이건에게 발탁됐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와 국방부에서 일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네오콘으로 위세를 떨친 리차드 펄, 리차드 파이프스, 더글라스 페이스, 폴 울포위치가 모두 잭슨 의원실 출신이었다.
지미 카터의 나약한 유화(宥和)외교에 절망한 헨리 잭슨은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을 지지했다. 진보정당이 되버린 민주당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리차드 펄, 폴 울포위치 등은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공화당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하지만 잭슨 의원과 도로시 포스딕은 민주당적을 유지했다. 1983년 9월 잭슨 의원이 71세로 사망했을 때 포스딕은 70세였다. 잭슨 의원은 50세가 거의 되어서 상원의 여직원이던 20년 연하의 헬렌과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두었다. 잭슨의 장례식을 치르고 상원을 나온 도로시는 잭슨 기념재단 이사, 워싱턴 대학 잭슨 국제관계대학원 운영위원 등을 지냈고, 잭슨 의원의 연설문과 기고문을 책으로 펴냈다. 그녀는 1997년 2월 83세로 타계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