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싸운 우리 병사들은 대체로 1925년 생부터 1934년생까지 일 것으로 생각된다. 요새 논의되는 6.25 참전 소년병은 대체로 16~17세였으니까 1933년~34년생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차 대전 때 징집되어 참전한 미군 병사는 대체로 1917년~1927년 생이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세대를 미국은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이라고 부른다. 대통령으로는 존 F. 케네디(1917년 생), 리차드 닉슨(1913년 생), 제랄드 포드(1913년 생), 지미 카터(1924년 생), 로널드 레이건(1911년 생), 조지 H. W. 부시(1924년 생)가 모두 그 세대이다. 케네디, 닉슨, 포드, 부시는 모두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고 레이건은 육군 장교로 영화부대에 근무하면서 전시 홍보와 영화제작을 담당했다.
닉슨, 포드, 그리고 레이건은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입대했고 미군은 이들의 경력을 참조해서 임관을 해서 배치했다. 로스쿨을 마치고 뒤늦게 입대한 닉슨은 태평양 도서 해군 항공기지에서 근무했고, 역시 로스쿨을 마치고 입대한 포드는 항공모함에서 함정장교로 근무했다. 조지 H. W. 부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해군에 입대해서 항공장교로 임관한 후 태평양 전쟁에 투입됐다. 당시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젊은 항공장교였던 부시는 일본군 포화에 격추되어 낙하산으로 간신히 탈출해서 망망대해에 떠 있다가 미군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어 모함에 복귀해서 또 다시 출격해서 일본 군함을 침몰시킨 후 전역했다. 부시와 같은 1924년생인 지미 카터는 해군사관학교에 다녔는데 졸업을 하니까 전쟁이 끝나서 2차 대전에 참전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전쟁은 베이비 부머 세대(Boomer Generation) 세대가 치른 전쟁이다. 즉, 2차 대전에 참전한 ‘위대한 세대’의 자식 세대가 치른 전쟁이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군복을 입은 장교와 부사관은 논외로 하면,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징집되어 베트남으로 간 미국 젊은이들은 1945년~1953년생이 대부분이니까 2차 대전 후 태어난 부머 세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주로 1945년~1950년생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우리나라는 징집연령이 만 20세였으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고교 중퇴자인 17세까지 징집을 했다. 미국은 베트남에 참전한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다. 2004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존 케리(1943년 생)는 해군에 입대해서 연안 경비정장을 지내며 실전을 겪었다. 2008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존 매캐인(1936년 생)은 해사를 나온 항공장교로 북베트남 폭격 중 피격되어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미국과 우리나라는 모두 대학과 대학원을 가면 징집을 연기하는 혜택을 부여했다. 대학생 징집연기는 2차 대전이나 6.25 당시에는 없었던 제도다. 유복한 계층의 젊은이들은 대학을 다니고 또 대학원이나 로스쿨을 다니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반면에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젊은이들은 고교 졸업장이 징집영장과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흑인들의 대학 진학률은 매우 저조했다. 흑인 남자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무사하게 졸업하면 당시로는 대단한 성공이었는데, 고교 졸업식이 끝나면 이들에게는 징집영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자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현역 대상 장정의 기준을 완화해서 보다 많은 흑인들이 징집대상이 됐다. 전체 인구의 11%만이 흑인임에도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 전투부대는 부대원의 20%가 흑인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전체 전사/사망자 중 흑인의 비중은 12.4%로 흑인 전체 인구에 비해서 크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뉴욕 브루클린의 흑인 거주지역의 큰 고등학교 졸업생 중 한 해 동안 베트남에서 전사한 숫자는 독립전쟁, 남북전쟁, 1차 대전, 2차 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하버드 동문 숫자 전체보다 많았다. 우리나라 신문에는 하버드 대학에는 전사한 동문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들먹이는 칼럼이 실리는 데, 우스운 일이다.
1971년 연말까지 미 지상군 병력은 베트남에서 철수했으나 한국군은 잔류해서 1972년 봄 공산군의 춘계 대공세를 버텨내야만 했다. 1951년 생인 내가 대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선 1972년에 징집이 됐을 것이다. 육군은 병력이 많기 때문에 1951년 생 육군 병사가 베트남에 참전하고 또 전사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해병대는 경우가 다르다. 해병대는 18세가 되면 자원입대할 수 있고, 전체 병력이 포항 사단과 청룡 부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1951년~52년생도 베트남에 파병될 가능성이 있었다. 1979년 7월 전역을 앞두고 현충일 행사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나와 동갑인 1951년 생 해병 전사자 묘를 볼 수 있었다. 파리협정 체결을 몇 달 앞 두고 전사한 동년배 전사자 묘 앞에서 느꼈던 착잡한 감정은 무어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나처럼 197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국 젊은이는 1970년 또는 1971년에 추첨 결과에 따라 징집이 되어 베트남에 파병됐을 가능성이 있다. 닉슨 대통령은 1971년 연말을 목표로 지상군 병력을 철수하고 있었고 미군도 적극적인 작전 보다는 방어에 주력하고 있어서 1971년에는 미군 전사/사망자가 많지는 않았다. 1970년부터는 미군 병력을 베트남에서 철수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이 베트남에 배치된 병사는 자기가 왜 베트남에 와야 하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1971년 말까지 미 지상군이 모두 철군하자 북베트남군은 1972년 부활절을 맞아서 대규모 공세를 취해서 고도(古都) 후에가 함락되고 사이공마저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닉슨 대통령이 대대적인 폭격을 명령하고 남베트남 군대가 투혼을 발휘해서 공산군을 간신히 막아냈다. 1973년 들어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확대되고 미국 의회는 ‘전쟁권 결의’를 통과시키고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축소했다. 1975년 들어 공산군은 총공세를 취했고 4월 30일 사이공은 함락되고 말았다.
6.25 전쟁에 참전해서 산화한 미군 장병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으나 베트남 전쟁은 그렇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1982년 11월 베트남 전쟁 전몰장병을 기리는 ‘추모의 벽’(Memorial Wall)을 세워서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찌된 일인지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존재하되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 이상한 일이다. ‘보훈의 달’이라는 6월이면 드는 생각이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