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사옥

삼성전자가 트럼프 ‘협상의 기술’에 말려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관세폭탄을 발표하기도 전에 서둘러 미국 현지 투자계획서를 들고 백악관으로 달려간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에 이어, 삼성전자로부터도 항복문서를 받아낼 빌미를 잡은 것으로 해석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난 3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주재한 각료회의에서 “회의 직전에 삼성이 관세 때문에 미국에 대규모 시설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만약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다면, 삼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시설을 건설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삼성은 대규모로 공장건설을 투자할 계획을 내놓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삼성전자 투자 관련 발언은 같은 날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 초청 ‘미국 투자’ 행사에서도 반복됐다. 그는 “삼성도 관세를 이겨내기 위해 매우 큰 공장을 건설할 것이라고 오늘 아침에 발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기업 경영자들 들으라는 듯이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삼성의 투자를 빌미로 다른 경영자들도 투자를 서두르라는 압박을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삼성은 지금까지 트럼프의 관세폭탄과 관련 어떠한 대책도 발표한 적이 없고, 특히 미국 현지 공장건설 투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트럼프 발언의 배경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시점 적으로 보면 트럼프 발언 바로 전에 있은 삼성전자의 1분기 실적 발표가 있었고, 실적발표에 이은 콘퍼런스콜에서 지난해 12월부터 CFO(재무최고책임자)를 맡고 있는 박순철 부사장의 발언이 빌미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박 부사장은 TV와 가전에 대한 트럼프 관세폭탄을 해결하기 위해 “프리미엄 제품 확대를 추진하고 글로벌 제조 거점을 활용한 일부 물량의 생산지 이전을 고려해 관세 영향을 줄이겠다”고 발언했다.

이 날 발표한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실적은 매출은 79조1000억원으로 전년 같은기간 대비 10.5%늘어난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1.2% 증가한 6조6853억원, 순이익은 전년대비 무려 21.74%나 늘어난 8조2229억원을 기록했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리고, 이익구조도 좋아진 가운데, 회사의 CFO가 관세를 언급하면서 생산 거점 이전을 언급하자, 바로 미국에 대한 공장 투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 트럼프 관세를 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국 현지 생산이기 때문이다. 결국 박 부사장이 트럼프 협상의 기술에 넘어간 처지가 됐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현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공장에서 세탁기를 생산하고 있고, 텍사스주 테일러에는 2030년까지 370억달러(약 54조원)을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지만, 트럼프가 말하는 미국 공장 투자는 이와는 별도의 새로운 투자를 요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지난 3월 31조원의 투자 보따리를 들고 백악관을 찾은 정의선 회장 역시 현재 미국에서 전기차를 포함한 생산공장에 투자를 하고 있지만 이와는 별도로 자동차를 포함 철강과 유통 및 AI까지를 망라한 투자계획서를 갖다 줬기 때문이다.

박순철 부사장의 이번 발언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염두에 둔 것일 수 있지만 미친 트럼프에게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이고 결국 삼성은 큰 혹을 붙인 격이 된 것이다.

트럼프의 생각은 “비교적 호실적을 보인 삼성이 ‘관세’를 언급한 것을 보니 삼성이 다급해진 모양이군, 이때 몰아붙여야지 더 큰 것을 받아내야지”였을 것이다.

트럼프가 1987년에 출간한 ‘협상의 기술(The art of Deal)’의 핵심을 한번 짚어보고자 한다.

트럼프가 말하는 협상의 기술은 한마디로 강한 압박과 회유 그리고 비즈니스다.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하면, “우선 최고 수위의 압박을 가해 상대방이 정신을 못차리게 한 후,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협상 자체를 철회해 무기력하게 한 다음, 상대의 기가 꺾였을 때 친밀함을 내비춰 틈을 보이게 하고, 철저한 비즈니스적인 계산으로 협상에 임한다”이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을 보면 즉흥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여 허술해 보이지만 실제 트럼프는 이 책에서 협상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전 준비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책에서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세번째로 중요한 것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관세폭탄 선언도, 삼성에 대한 현지 공장 투자 발언도 철저히 준비된 상태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외에도 “항상 거래에서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잃을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때때로 전투에서 지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등이 있다.

트럼프에 대해 공부하고 최소한 ‘협상의 기술’이라는 책만이라도 이해했다면, 트럼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준비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이었을 것이고, 반대로 트럼프가 말한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든지, 전투에서 지면서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의 순진한 처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관세폭탄을 터트리기 전에 먼저 보따리를 갖다 준 현대차나, 그동안 잘 인내하고 버티다가 말한마디 실수로 엄청난 빌미를 제공한 삼성 모두 마찬가지다.

현대차의 경우 지금쯤 보따리를 전달했다면, 현대차도 구하고 나라도 구했을 것이고 삼성의 부담도 훨씬 줄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지금이라도 트럼프가 트럼프 나이 40대 중반의 왕성한 비즈니스맨일 때 쓴 ‘협상의 기술’을 읽어보기 권한다. 그것이 트럼프를 대하기 전 필요한 준비다.

이기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