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헌법재판관들 심리 장면
우리 사회는 모든 일을 사법절차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툭하면 고소 고발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하며 대법원까지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린다. 분쟁을 평화롭게 그리고 저비용으로 해결하는 사회적 장치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헌법재판소는 위헌 여부를 판정해야 하는 최후의 심판장이기에 그 창구는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함에도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그 문턱이 너무 낮아서 사건이 산적해 있으니 정상이 아니다. 일반 국민이 제기하는 헌법소원도 그렇지만 취임한지 며칠도 되지 않은 기관장을 탄핵해서 사안을 헌재로 보내버리는 식으로 정치권도 헌재 과정을 남용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재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헌법이나 법률에 분명한 규정이 없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그런 권한을 행사하는 자체가 통상적인 사회관념에 맞지 않음에도 한덕수 권한대행이 그런 조치를 강행하더니 이 문제도 결국 헌재가 답을 내어 놓고 말았다. 이처럼 일반국민은 물론이고 정치권 자체가 자신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헌재 재판관 9명에게 그 해결을 위탁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재는 그야말로 주권적 특권(Sovereign Prerogative)을 부여받은 기관이 되고 말았는데, 이런 현상이 과연 우리 헌법이 의도한 결과인지에 대해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
미국 대법원과 달리 우리나라 헌재는 어떤 법률 조항을 위헌으로 판정하지 않고 국회에 위헌을 해소하는 입법을 하라는 식으로 판결할 수 있다. 헌재가 어느 법률 조항을 위헌으로 판시하면 너무나 급격한 변화가 오기 때문에 국회가 입법절차를 통해서 위헌 상황을 해소하라는 것이다. 외관상으로 본다면 헌재가 국회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생각할 점이 있다. 헌법재판도 넓은 의미의 사법(Adjudication)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항에 대하여 결정을 하는데 그쳐야 하는데, 국회에 대해 위헌을 해소하는 입법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헌재가 국회에 대해 명령을 하는 지위에 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이런 현상이 과연 우리 헌법 체제에서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에 대해 위헌을 해소하는 입법을 하라고 결정했음에도 국회가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이런 경우가 벌써 여러 번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낙태죄 폐지다. 헌재는 낙태를 처벌하는 법률 조항을 헌법 위반으로 보고 국회에 대해 입법으로 해결하라고 결정했지만 국회는 10년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관심 자체가 없다. 20대 국회 때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낙태죄 폐지를 위한 의원 입법안을 만들어서 제출한 적이 있었는데, 이정미 의원과 법안에 같이 이름을 올린 의원 19명은 곤욕을 당했다.
국회 앞에서 20명 의원의 사진을 내걸고 “너희들은 부모도 없이 태어났느냐”고 스피커로 비난하는 일인 시위가 임기 끝날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어느 의원도 낙태죄 폐지 법안에 나서지 않을 것이니, 과연 낙태죄가 아직 살아 있는지 폐지됐는지도 불분명하다. 헌재는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낙태죄를 위헌 무효로 깨끗하게 결정했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헌재가 자기들이 책임을 지기가 부담스러우니까 악역(惡役)을 국회에 밀어 버려서 이런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헌재는 대의기관이고 입법기관인 국회를 존중한 것이 아니라 국회를 자기들의 하부 기관으로 보고 명령한 것이기에 이런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재판관 9명을 입법 행정 사법부 수장이 지명해서 대통령이 임명토록 한 것은 이탈리아 헌법과 오스트리아 헌법을 참조한 것으로 그 자체는 적절하다. 대통령이 헌재 재판관을 임명하는 것은 국가원수로서의 의례적인 절차로 보아야 하며, 오스트리아 헌법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헌법재판소장 임명이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헌재 재판관 중 1인을 헌재소장으로 임명하며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헌재 초기에는 대통령이 헌재 재판관 겸 헌재소장으로 지명해서 국회의 동의를 거쳐 임명했으나 이런 절차가 헌법에 배치된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대통령이 헌재 재판관 중 한 사람을 헌재소장으로 지명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나 이 경우 이렇게 헌재소장이 된 재판관은 어느 기관 몫이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대법원장이 추천해서 헌재 재판관이 된 사람을 대통령이 헌재 소장으로 임영하면 이 재판관은 대법원장 추천 몫인지 아니면 대통령 추천 몫인지 하는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재판관이 되어 있는 사람을 상대로 국회가 청문을 하고 표결을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헌재 재판관이 재판소장으로 지명됐다가 국회 동의에서 부결되어도 아무일도 없다는 식으로 재판관으로 계속 근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어느 재판관도 재판소장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니 재판소장 임명이 불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헌재소장은 헌법재판관들이 3년 임기 정도로 자체적으로 선출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한다. 이 문제는 물론 헌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이다. 1987년 개헌 때 헌재 운영을 두고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