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제 26대, 45대 국민공회 의장

프랑스 혁명가들이 가장 가까운 동지들을 배반하고 참혹하게 죽였던 일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나 이해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광적 분위기였던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과격파들은 국경의 야만인이 아닌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을 익사시켰고, 대포로 집단 포격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아연실색할 뿐이다. 역사가들은 프랑스 공포 정치의 원인에 대해 대체로 의견일지를 보지 못한다.

1793년 10월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과 처형, 외국의 위협, 그리고 혁명의 의미를 둘러싸고 급진파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국민공회는 공포 정치의 주 무대가 되었다. 정치적 갈등은 곧바로 살육의 정치로 변모했다. 1793년 10월에 급진적인 산악파는 좀 더 온건한 지롱드파를 재판하여 처형함으로써 서로 대립했다. 로베스피에르파는 상퀼로트 세력의 지도자격인 에베르파를 분쇄하고자 당통파와 제휴했으며 이번에는 2주일 만에 당통과 그의 추종자들이 단두대에 서게 되었다. 공포 정치가 통치제도화하여 파리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오랜 귀족의 후예로부터 농민 반란군, 1789년의 혁명 영웅, 탈기독교에 저항하는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반대자들이 대상이 되었다. 50만 명 이상의 체포되었으며 수만 명이 처형되었다.

어떻게 프랑스가 1791년의 ‘계몽주의적 헌법'에서 공포 정치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모든 급진파들을 자극했던 장 자크 루소 같은 사상가들의 절대주의적 이상을 광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실현시키려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다른 학자들은 돌발적인 사건과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반응으로 설명하면서 그 교차점에 혁명의 급격한 방향 사례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모든 힘 중 가장 강력한 힘만이 프랑스혁명에서 보이는 것 같은 광범위한 사회 변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는데, 1780년대와 1790년대 초반 프랑스인의 고통스러운 궁핍과 필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국민들은 몇 주일 또는 몇 달 동안 굶주렸다. 프랑스 봉급 생활자들 봉급의 절반이 빵을 사는 데 사용되었다. 역사가 페렌츠 페어(Ferenc Fehér)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직 굶주려 본 사람들만이 인간 존재에서 굶주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치적 사태를 포함한 외부 사건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은 분노로 나타나게 된다.”

공포정치 기간 동안 굶주림은 두려움을 부르게 되었다. 그 공포라는 것은 단지 다음날의 식량 문제뿐만 아니라 야간의 치안 상태에 대한 걱정, 내일 있을지도 모르는 체포 처형 약탈에 대한 공포였다. 농부들은 시골의 약탈자들이 되었다. 외부의 적들이 위협의 강도를 높여가자 그 위협은 내부와 연결되었다. 외국인이나 왕당파의 귀족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기근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팔머는 ’외국의 음모는 허구‘라고 결론지었지만, 로베스피에르 같은 통치자는 그것을 이용했으며 굶주린 시민들의 격한 감정에 부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시민 분노에 불을 지피는 정치인은 진짜 정치인이 아니다. 분노의 불길에 의존하는 정치인은 자칫 그 불길에 스스로 타죽는다.)

급진적 혁명가들은 종종 그들에게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필요나 공포. 증오심에 끌려다녔다. 누가 이러한 잠재적인 추종자들이었는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상퀼로트라고 불린 급진 혁명의 보병부대였다. 역사가 알프레드 코반은 “상퀼로트는 본질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문맹이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정말 하찮은 사람들이었다”라고 기술했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상퀼로트의 혁명 투지를 존경했으나 그들의 원칙, 개인주의, 무이념을 차장하지는 않았다. 1793년부터 1794년까지 파리를 통치하기도 한 상퀼로트는 흥분하면 8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의회며 다른 권력 핵심부를 포위하고 습격하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급진파의 주도 세력은 그들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상퀼로트는 무산계급이나 어떤 사회 계급이 아니라 가내 수공업자, 노동자, 점원, 그리고 일부 재산가들의 네트워크워크였다. 그들은 단결과 미덕을 강조하면서 대중의 의지가 바로 그것의 표현이라고 선동했다. 그들은 귀족에 대해 한결같은 증오를 품고 있는 평등주의자들이었다. “우리는 피를 흘려야만 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 어떤 목수의 말처럼, 그들은 폭력을 수반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혁명적 진보에 대한 불타는 신념으로 움직였다.

상퀼로트는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 대표자들은 소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혁명의 신념을 자신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급진파들을 모질게 대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란 국민들이 계속 모여 앉아 모든 공무를 직접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으나 소용없었다. 상퀼로트는 그 불만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혁명 좌파의 선봉장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 등이 포함된 자코뱅당은 1791년 6월 루이 16세가 탈출 기도에 실패하자 왕정 지속 주장파와 공화국 창건파로 분열되었다. 끊임없는 외국의 위협 속에서 프랑스 내부의 공포와 증오가 심화되고 소요가 지속되자 자코뱅당의 좌파는 클럽을 장악하여 온건파들을 숙청하고 거리의 혁명가들과 연합했다. 1792년 후반쯤 급진파들은 전국에 걸쳐 수십만 명의 동조자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규율을 강화하고 반대자들을 적극적으로 숙청했다. (민중과 연합하는 전략을 펼치고 독재와 피의 숙청으로 간 러시아, 중국의 원형)

이처럼 자코뱅당은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조직을 구축하면서 1789년의 혁명 이상과는 점점 멀어졌다. 역사학자 알프레드 코반에 따르면 “자코뱅의 이념은 의식(儀式)의 발달, 정통성 테스트, 숙청 및 공개 좌우 비판과 함께 점점 편협해졌다.” 거기에는 더 이상 이상과 이념이 설 자리가 없어졌던 것일까. (러시아,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와 어찌 그리 같은지...)

자코뱅당은 시작 단계에서 헌법의 원칙에 충실했고, 도덕과 리더십에서는 로마의 모델을 지향했다. 하지만 공포 정치의 시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적 이상은 독재와 탄압을 가리기 위한 기회주의적 정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단 한 사람으로서 자코뱅당의 헌신과 극단주의를 상징한다면 그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는 원내 전술의 대가였고, 싸고 풍족한 빵을 약속하는 국민의 소유자였으며, 지칠 줄 모르는 연설가였다. (음모론자, 포퓰리스트, 웅변가의 모습에서 마오쩌둥과 레닌을 연상?)

그는 혁명 좌파의 선봉장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극진파 내부의 경쟁 속에 빠져들었고 혁명의 적들로부터 혁명을 보유할 목적으로 1793년 국민공회에 의해 설립된 국가 공안위원회에서 그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강력한 의지와 함께 어떤 급진파보다도 더 급진적인 능력, 그리고 끊임없는 증오심과 반대파에 대한 의심으로 그는 곧 중앙집권적이고 전제적인 혁명의 통치수단으로 공포 정치를 설파하고 실행했다. 한때는 국민의 자유를 옹호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혁명을 적들이 어디에서 발견되더라도 이를 분쇄하는 ’정부의 무제한적인 자유‘로 자유를 인식하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도전에 응징한다. 상대가 어제의 동지일지라도 관련이 없다)

국가공안위원회는 공포 정치의 표적을 상퀼로에게로 향했으며 그들의 충성스럽지 못한 지도자를 처형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1794년 봄에 이르러 혁명 정부는 ᅟᅡᆯ육의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성공은 결과적으로 그의 실각을 불러왔다. 한 생존자는 “그는 지배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신이 되어야만 했다”고 말했다. 차례가 되어 그가 살육 대상이 되었을 때 상퀼로트 내의 그의 오랜 지지자들은 그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공회에 충성을 다했던 군인들이 자살 시도 끝에 기진맥진해진 그를 단두대로 끌고 갔다.

무엇이 그토록 끔찍할 정도로 잘못되었을까? 1789년부터 1791년까지의 2년간 프랑스인들은 거의 교과서적인 혁명을 만들어 냈다. 왕정의 통치자들은 분노에 떨면서 권력을 포기했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인권 선언의 약속과 헌법에 제한된 자유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면서도 그렇게 혁명적이지는 않았다. 왕정파와 혁명파는 불안정할지는 몰라도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갔고 힘도 있음에도도 안정적인 변화를 향해 프랑스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어리석은 왕의 탈출 시도가 실패로 끝났고 파리와 지방은 모든 파괴적 요소들이 터져 나와서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정치의 중앙에 어떤 리더십도 자리를 놓을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났다. 왕과 평민간의 균형 대신 권력의 정상에서 새로운 인물들이 권력과 생존을 위해 무자비하게 투쟁하게 되었다. 그 어떤 세력도 안정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필요와 요구가 폭증하고 그들의 희망과 기대가 분출되면서, 그리고 자유가 허가증에, 평등이 극단주의에, 박애주의가 살해주의에 자리를 내주면서 절망적인 상태의 시민들은 생존과 안전을 원했고 구세주를 찾게 되었다. 그 구세주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로 출발했다가 ‘허가증, 극단주의, 살해주의’로 변질됐다. 러시아혁명, 중국혁명도 비슷한 성격의 혁명으로 ‘인류를 위한 혁명이 아니라, 권력자들을 위한 참극’이었다. 한국의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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