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담론>의 허구2 - '공감'이란 말의 한계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6.12 21:52 | 최종 수정 2024.06.13 18:45 의견 0

신영복은 글에서 공감을 매우 강조합니다.

“공감, 매우 중요합니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것은 가슴 뭉클한 위로가 됩니다. 위로일 뿐만 아니라 격려가 되고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음모(陰謀)라고 합니다. 음모라는 수사가 다소 불온하게 들리지만 근본은 공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작 불온(不穩)이라는 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소외구조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음모는 든든한 공감의 진지(陳地)입니다. 소외 구조에 저항하는 인간적 소통입니다. 글자 그대로 소외(疏外)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실이 공감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감하고 거기서 끝내야 할까? ‘너를 영원히 기억할게’라고 말하고, 우산 대신에 같이 비를 맞아주면 끝나는 걸까요?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에서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사람의 이기심이 아닌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본능적으로 갖고, 인간이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본성적으로 이타심의 원리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관한 관심은 우리에게 신중의 덕성을 권장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한 관심은 정의와 자혜의 덕성을 권장한다. 후자의 미덕 가운데 정의는 우리가 타인에게 침해를 끼치지 않도록 억제하며, 자혜는 타인의 행복을 촉진하도록 고무시킨다.”

그렇지만 사람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공감의 한계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듭니다.

‘중국(中國)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대부분의 유럽의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들은 그 불행에 대한 강한 비애를 표명할 것이나 그 이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고 편안한 저녁을 보낼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그가 이렇게 (편안하게) 밤을 보낼 수는 없다.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251-52쪽)’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기보존 욕구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복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보존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덕목이 신중의 덕성으로, 자기 자신의 행복 보존 안락에 관여하는 ‘신중의 덕목 대상’은 건강 재산 지위 평판입니다. 신중한 사람은 미래의 더 큰 안락과 행복을 위해 현재의 직접적인 쾌락과 기쁨을 절제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의무가 요구되는 본인의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실제로 좌파나 우파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공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과거 5.18 행사에 참석했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밤에는 유흥주점에서 즐겨 놀았고,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부동산에 투자하고, 자녀 교육을 위해 문서를 조작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신영복이 말하는 공감이 한계가 있으며, 자칫 ‘공감의 무기화’ 즉 ‘넌 왜 공감하지 못하는건데?’라며 타인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해야 합니다.
코라시아(필명),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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