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문리대, 그리고 인문대에는 오랫동안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가 있었는데, 재작년에 비로소 역사학부를 만들어서 그 안에 한국사 전공 등 세부 전공을 두었다. 대학원도 아니고 대학 학부에 사학과가 아니고 국사학과 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를 둔 경우는 아마도 서울대가 유일했을 것 같다.
미국의 주립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하버드, 예일 같은 인문학이 강한 대학에도 학부는 ‘사학과(Dept. of History)’ 밖에 없다, 일본의 도쿄 대학도 마찬가지다. 서울대도 원래는 사학과가 있었는데 1969년 입학생부터 국사, 서양사, 동양사로 찢어졌다. 같은 해 생물학과는 식물학과, 동물학과, 미생물학과로 3분 됐다.
내가 그것을 잘 기억하는 것은 1969년에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자연히 서울대 학과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기고 문과 180명 중 절반이 서울대 법대와 상대를 갔고 문리대 문과는 몇 명 가지도 않았다. 그것도 비정상이었다.) 그 때 고3생인 우리들도 서울대 사학과와 생물학과가 3분 된 것은 교수들의 전공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알았다. 3분 된 생물학과가 먼저 통합되었고 사학과도 뒤를 이었으나 그것은 세계 대학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서울대 국사 교수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사건이 있어서이다. 몇 년 전 <땅의 역사>로 유명한 박종인 기자가 쓴 <매국노 고종>을 흥미롭게 읽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과감한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근래에 비교적 한가한 탓에 박종인 기자의 유튜브도 찾아보고 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고종을 현군(賢君)으로 치켜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게 됐다. 명성황후 드라마, 그리고 ’고종의 길‘도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특히 국왕이란 사람이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도망한 것을 기념하는 ’길‘이란 이해곤란이다.
오래전에 국사를 배웠을 때, 그리고 우리 역사 책을 읽었던 기억을 되살리면 순조, 철종, 대원군, 고종, 민비, 순종으로 이어지는 19세기는 ’한심‘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오래 전에 내가 읽었던 역사책은 국왕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는 인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온건 개혁파였던 김홍집과 어윤중이 죽은 것도 그냥 군중에 의해 죽은 것으로 서술하는 식이다. ’국왕‘이란 ’전근대‘가 우리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서론이 너무 길었다. 박종인 기자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의 여러 가지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해 오고 있음을 잘 알 것이다. 박종인 기자가 제기한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반론다운 반론을 한 적이 없다. 마치 국사학과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무슨 주장이냐 하는 식이다.
사태가 이 정도가 됐음에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들이 아무런 말이 없는 것도 특이하다. 거기엔 근대를 전공한 교수가 아예 없는 것 같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고,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결코 경미하지 않은데도 국사학 교수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