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8월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8.15는 광복 80주년이었고 어제 8.29는 조선(또는 대한제국)이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지 115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인지 지난 한 달 동안 8.15 해방을 기억하는 특집기사가 여기저기 나왔다. 또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말을 두고도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곤 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있는 ’회고‘를 근래에 읽은 바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 총독부는 1940년 가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다. 1930년대 들어서 만주 침략을 시작한 일본은 중국과 전단(戰端)을 열어 그들의 제국주의 야욕을 향해 질주하더니 그래도 우리 민족이 읽어 온 신문을 아예 폐간시킨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한반도에서 나오는 신문은 총독부가 발행하는 일어 신문 경성일보과 우리 말 신문 매일신보뿐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됐다는 것은 두 신문에서 일하던 기자와 직원들이 일제히 실직했음을 의미했다. 동아 조선 두 신문도 1930년대 들어서 경영이 나빠졌는데, 미국의 대공황이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총독부도 긴축을 한 탓에 경기 자체가 침체했다고 한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그나마 기자들이 나름대로 기사를 쓸 수 있는 부서는 학예부, 즉 지금의 문화부였다고 한다. 그 시절에 원고료를 받을 수 있는 매체는 매일신보밖에 없어서 염상섭, 이상 등 문인들은 매일신보에 글을 보내고 실어달라고 하고 원고료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또한 동아와 조선에 있던 기자들이 생계 때문에 할 수 없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취직해서 무기력한 기자 노릇을 했다고 한다. 당시 동아와 조선에 있던 기자가 매일신보로 직장을 옮기면 자기 자신을 두고 ’매신‘(賣身)을 했다고 자조(自嘲)했다고 한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는 신문이라곤 매일신보 밖에 없었다. 당시 매일신보 3년차 기자이던 김영상(金永上 1917~2003)은 8월 15일에 있었던 일을 자신의 회고에서 이렇게 썼다.

“풋내기 기자들까지 시국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4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조선군 사령부(조선 주재 일본군 사령부를 의미한다) 출입기자 남상억이 외근에서 돌아오면 편집국장과 귀엣말로 쑥덕거리고 편집국장이 황급하게 중역실로 내려가곤 할 때 부러웠는데, 10일경인가 군사령부가 등화관제까지 거둔 채 대낮같이 전깃불을 켜놓고 부산하게 움직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편집국 안에 의심쩍어하는 의아스런 검은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러나 정작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국왕의 이른바 옥음(玉音) 방송을 듣고 나서는 어떤 사원은 ”이럴 수가? 무조건 항복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침통해 하는가 하면 대부분 사원, 그중에서도 젊은 사원들은 매일신보에 몸 담고 있는 것조차 잊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기뻐하였다.

사장 이하 중역들도 속수무책이었고 핀집국장 및 편집국 부장급은 그날로 제자리를 뜬 가운데 편집국 차장급이 주체가 되어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로 이 시각에 항복기사를 내보낼 수 있느냐? 향후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할 수 있느냐? 이런 문제를 놓고 의논 끝에 신문인으로서 사실 그대로를 보도할 의무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침내 16일 일제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호외(號外)를 발행하였다.

이날 오전 11시 무렵 통바지 저고리 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중노인이 옆구리에 호외 뭉치를 끼고 신문사 문밖으로 창황히 빠져나가다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손을 내밀며 호외 한 장을 얻어 가지려고 몰려드는데, 자못 즐거운 듯 호외 몇 장을 나누어 주면서 함께 어울려 기뻐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3.1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씨였다. 방송만 듣고는 어리둥절하던 시민들이 호외를 읽고 나서 비로서 꿈에서 깨어난양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녹취 한국언론사, 대한언론인회)

8월 16일 저녁, 건준위원장 안재홍이 육성으로 “오늘의 해방은 우리 민족 모두의 기쁨입니다”라는 육성 라디오 방송을 해서 일본의 패망과 해방이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매일신보는 자치위원회를 결성해서 신문 발행을 계속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고 9일에는 총독부 청사에서 일본군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다음 날 하지 장군이 기자회견을 했고 매일신보 기자 김영상은 회견 내용을 취재해서 보도했다. 하지만 매일신보도 내부에서 좌우익 대립이 발생해서 9월 15일에 편집국이 의도하지 않은 사실과 다른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보도가 인쇄되어 나오는 큰 사고가 있었다. 매일신보는 9월 23일자에 기자 일동 명의로 매일신보가 총독부의 기관지였음을 사과하는 반성문을 게재했다. 이 반성문을 쓴 사람은 매일신보에서 학예부장을 오래 지낸 조용만(趙容萬 1909~1995) 기자였다. 조용만은 소설가이자 영문학자로 그 후 고려대 교수를 지냈다.

이승만이 귀국한 날은 10월 16일이었고, 23일에는 독립촉성위원회가 결성됐다. 미 군정은 인민공화국 수립 보도로 공신력이 떨어진 매일신보를 11월 5일자로 정간하고 11월 5일자로 ’서울신문‘이란 새로운 신문으로 발간토록 했다. 오늘날의 서울신문이 태어난 것이다. 그즈음 중앙일보, 대동일보 등 여러 신문이 우후죽순처럼 나왔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그해 12월에 복간해서 신문을 낼 수 있었다.

김영상은 그 후에도 서울신문 정치부장을 지내다가 조직개편으로 1953년에 서울신문을 떠났다. 그리고 김태선 서울시장의 부탁으로 서울시 시사(市史)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서울시 향토사를 집필했다. 한국일보가 창간하자 잠시 부국장을 겸직했으나 다시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일에 전념했다. 그리고 한국일보에 1958년에서 1959년에 걸쳐 ‘서울 육백년’ 시리즈를 240회에 걸쳐 연재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4.19 후 동아일보 최두선(崔斗善) 사장이 김영상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발탁함에 따라 그는 언론계에 복귀했다. 김영상은 장면 내각이 약체라는 비판적 기사를 내어 비판하기도 했으며 윤보선 대통령에게 이승만 대통령 시절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던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靑瓦臺)로 개명토록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그는 신문사에 일찍 달려 나와서 상황을 점검하는 등 긴박한 시간을 보냈다.

1961년 6월 4일자 동아일보는 윤보선 대통령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는데, 윤 대통령이 가을에 열리는 유엔 총회 전에 정권을 민간에게 복귀시켜야 한다고 발언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김영상 편집국장과 정치부 이만섭, 이진희 기자가 군사정부에 의해 연행되었다. 김영상 국장은 나흘 만에 석방되었으나 두 기자는 41일 만에 석방되었다. 5.16 후 군사정부와 언론과의 첫 충돌이었다.

동아일보는 1962년 1월 1일자 신년호 특집으로 1~2면에 걸쳐 박정희(朴正熙) 국가 의장과 단독대담을 하고 이를 1~2면 기사로 내보냈다. 박정희 의장은 대통령책임제 정부형태로 하고 국회는 단원제로 하는 헌법제정절차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영상은 박 의장을 만나서 민정이양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한 의견을 들으려 했다고 했으나 동아일보가 군사 쿠데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다. 이 일로 김영상은 편집국장을 물러나고 논설위원, 심의실장, 수석정책위원을 지내다가 1974년 10월 은퇴했으며 2003년 7월 86세로 타계했다.

양정고등학교와 동경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영상은 1943년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취직할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매일신보가 수습기자 9명을 뽑는다고 해서 응시했는데, 당시 지원자가 10,000명이 넘어서 신문사는 여러 건물을 빌려서 입사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김영상은 말년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처세에 실패하고 인생에 성공한 일생”으로 표현했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