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식민주의 시대 1 : 쿠데타와 신자유주의

수도시민경제 승인 2024.08.30 09:30 의견 1


어느 시대건 세계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고 부자나라라고 통칭되는 글로벌 북부의 국가들은 신대륙 발견 이후 한동안은 무력으로 식민지를 지배하고 노예들로 하여금 생산을 하게 함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글로벌 남부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세계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독립된 국가의 지도자들은 미국, 영국 등이 초기에 자국의 개발을 위해 사용했던 보호무역, 유치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생독립국은 지도자들이 발전주의 정책을 통해 보호무역을 추진하고 수입품에 대한 관세부과와 농업, 유치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통해 국민들의 소득수준과 생활수준을 상승시킴으로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글로벌 남부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자원을 더 이상 약탈해 가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 풍부한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자 했고, 서구의 개입없이 자국의 산업을 일구고자했다.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 이것은 막아야만 하는 위험한 움직임이었다. 서구의 경제적 지배력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p45).

미, 영, 프 등 서구 열강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발전해 나가는게 못마땅했다. 이에 서구는 글로벌 남부 전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수십명을 쿠데타(미국 조지아주에 위치한 미군기지 School of the Americas에서 암살 또는 독재자 훈련시킴)로 축출하고 서구의 경제적 이득에 친화적인 독재자를 세우기 위해 은밀히 개입했다. 그리고 나면 독재자들은 서구의 원조로 지탱하였다(p47).

서구는 이러한 발전주의 정책을 '공산주의'라고 악마화했고 이러한 프레임 덕분에 서구 정부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잔인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암살되거나 권력에서 축출된 글로벌 남부지도자중 실제로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케인즈주의적 혼합 경제인 '제3의길'을 주창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미국과 유럽이 큰 효과를 보았던 초기 개발주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레토릭을 걷어내고 본질을 보면, 서구가 우익 쿠데타를 지원한 것은 냉전 이데올리기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했다). 그들의 목적은 서구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었고, 냉전의 베일로 그와 같은 명백한 사실을 대중의 시야에서 가렸을 뿐이다(p19).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서구가 지원한 쿠데타로 많은 주요 국가에서 진보가 억눌렸고 개발도상국 세계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글로벌 남부는 떠오르고 있었다.

1953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발전주의에 맞서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발전주의가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그는 냉전주의와 연결시켜 발전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첫단계라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발전주의 국가들을 소련에 연결지었고, 미국인들의 인식에서 발전주의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었다.

이란, 과테말라, 브라질,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국가 등에서 초기 민주 정부가 발전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국유화를 통한 보호주의 무역과 보조금 등의 정책을 사용했으나 미국, 프랑스 등 서구 국가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고난 후 장기간 독재정부를 수립하여 서구 국가와 기업들에 유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을 수립하게 하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명백히 파괴적이어서 민주적인 정부에서는 도입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많은 경우에 그것을 도입하는 유일한 방법은 군부독재와 국가권력의 공포통치로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공격적으로 경제를 탈규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격적으로 정치를 규제해야 했다. 완전한 시장 자유는 완전한 정치적 부자유를 필요로 했다. 대규모 수감과 수용소가 필요할 정도로까지 말이다(p186).

미국과 유럽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지 않았다. 케인즈주의 시스템이 훨씬 더 인기가 있었고 민주주의가 멈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와 달리 미국과 유럽에서는 케인즈주의 대신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도하려고 해도 유권자들에 의해 즉각 거부될 것이 틀림없었다.

미국과 유럽은 케인즈주의에 힘입어 1950년대와 1960년대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지만, 1970년대초에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했다. 실업이 인플레이션과 나란히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케인즈주의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케인즈주의 비판자들은 그들이 실험해온 대안을 펼칠 황금같은 기회를 맞이했다(p187).

닉슨행정부 시절 팽창적인 통화정책, 베트남 전쟁으로 정부지출 증가, 미국이 급증한 정부부채를 잘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로 달러가치가 급락하여 인플레이션을 한층 더 촉진하였고, 이에 더해 1973년 OPEC이 유가를 올리자 생산비용이 오르며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실업률이 오르는 퍼팩트 스톰이 왔다(p188).

신자유주의자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은 케인즈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부자들에 과도한 세금 부담을 지우고 경제에 너무 많은 규제를 가했으며 노조가 너무 강력해졌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높아져서 생긴 문제라고 하였다. 정부개입이 시장을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가격을 왜곡해 경제 행위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전체 시장 시스템이 뒤흔들렸고 불가피하게 스테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케인즈주의가 실패했다고 선포했고, 따라서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시스템은 무너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들의 계급적 권력을 회복할 방법을 갈구하던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호소력이 있었고 이들 부유층은 그 주장을 지지하는데 기꺼이 나섰다(p188).

1980년대초 신자유주의의 첫번째 요소는 긴축적인 통화정책이다. 즉, 높은 금리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고 이로 인해 경기불황이 발생하면 실업률은 올라가고 이로인해 상대적으로 노동조합의 힘은 약화하게 된다. 또한 임금이 급감했고 주택담보대출 상환불능이 발생하게 된다.

두번째 요소는 '공급측 경제학'이었다. 레이건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방법으로서 이미 부자인 사람들에게 돈을 더 주고자 했다. 기저의 논리는 부자들이 이러한 횡재를 생산적인 방식으로 투자해 새로운 부를 창출하면 점차 그 이득이 사회의 나머지로도 '낙수(trickle down)'되어 퍼지리라는 것이었다.

세번째 요소는 금융분야의 규제 완화였다. 레이건은 은행규제를 많이 완화하여 은행들이 대공황의 원인이 된 위험한 투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상업은행(고객예금받는)과 투자은행(위험한 투자를 하는)을 분리한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eagall Act)을 철폐했다

영국의 대처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를 도입하였고 1989년에는 지역주민세와 같은 역진적인 조세를 시행하였다. 노조를 분쇄하고 공공지출을 크게 삭감하였고, 대처리즘의 간판정책으로서 영국석유, 영국항공, 롤스로이스 등 유명한 공기업 대부분과 수도, 전기를 포함한 공공 유틸리티를 민영화 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과 영국에서 불평등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증가시켰다. 미국에서 상위 1%의 소득 비중이 1980년 8%에서 오늘날 18%로 증가했다. 영국도 비슷해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몫이 6.5%에서 13.5%로 증가했다(p189).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를 위한 것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은가? 게다가 부유한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또한 경제성장을 촉진하지도 못했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공급측 경제학의 유일한 정당화 근거였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작된 이후 부유한 OECD국가들의 1인당 GDP성장율은 떨어져서 1960년대와 70년대에 평균 3.5%였던 것이 80년대와 90년대에는 2%가 되었다. 이 숫자들이 보여주듯이, 경제 발전의 도구로서 신자유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부유한 지배층의 권력을 회복하는 도구로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p191).

식민주의가 종식되고 나서 글로벌 남부 전역에서 도입된 발전주의 정책은 불평등과 빈곤을 줄이는데 효과가 있었다(p191). 가난한 나라들은 서구의 원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공정한 글로벌 경제체제를 원했고, 경제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원했으며, 자신들의 영토가 외국 세력의 자원 추출경쟁을 위한 게임판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 그러한 임금을 방어할 수 있는 노조, 착취를 막을 수 있는 국가의 규제가 필요했다.

양질의 공공서비스(보편 의료와 교육 등), 그것에 자금을 댈 수 있는 누진적인 조세가 필요했다. 토지에 접근할 수 있는 공정한 권리와 천연자원에서 나오는 부에 대한 공정한 분배가 필요했다. 다른 말로 진정한 발전에는 권력의 재분배가 필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권력의 재분배는 자연스럽게 자원의 재분배를 촉진했다. 일반적으로 발전주의 정책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하에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이루어졌다(p191~192).

이처럼 서구열강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민주적인 정부를 통해서는 그 시행이 쉽지 않은 만큼 글로벌남부 국가들을 대상으로 쿠데타를 통해 독재자를 지원하여 서구열강의 이익을 챙기는 신식민주의 정책을 펼친것이다.

현대의 식민주의는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국가안에서도 부자를 위한 정책만 있고, 부자들이 나누어주는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라는 낙수효과를 주장하면서 결과적으로 서민들을 착취한다면 이 또한 극소수 부자가 서민을 지배하는 신식민주의라고 할 것이다.

다음에는 세계 3대 국제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한 신식민주의에 대한 글을 게시할 예정이다.

※ 이 글은 '격차'(The divide, Jason Hickel, 2017, 국내에는 2024년 출간)에서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이종선, 경기주택도시공사 기회경제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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