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8일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자산운용사 CEO들과의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있다. 사진=금감원
8일 이복현 금융감독원 원장이 지배주주들 이익을 우선시하는 행태를 보이는 기업들을 향해 각성이 필요하다고 경고하고 나서면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밸류업과는 반대로 밸류킬 하고 있는 기업들이 긴장하게 됐다.
이 원장의 이번 발언은 근래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열사 합병이나 이동을 통해 그룹을재편하고 있는 두산그룹이나 SK그룹의 오너 배불리기를 염두에 한 것이어서 향후 이들 그룹 행보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 원장은 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산운용사 CEO 간담회’ 이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두산 계열사 합병이 그릇된 관행인지 묻는 질문에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지속 정정(공시) 요구를 하겠다는 게 금감원 입장이자 당국 내에서 합의가 된 부분”이라고 답했다.
이는 금감원이 지난달 24일 한 차례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구했음에도 두산로보틱스가 두산밥캣과의 합병비율을 기존과 같은 0.63대 1대로 유지하겠다고 정정공시 한 데 따른 발언으로 해석된다. 지난 2015년 이후 적자를 이어오고 있는 기업이 평가 절상되면서 두산밥캣 주주들은 불만을 표하고 있다.
두산밥캣을 인수하는 두산로보틱스는 지난해 말 기준 연간 매출은 530억원에 영업이익은 192억원 적자, 순이익도 159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매출 기준으로는 두산밥캣의 183분의 1이고 이익구조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인수 구조 자체가 지나치게 왜곡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는 견해를 내고 있다.
로보틱스의 밥캣 인수 방법은 밥캣 1주당 로보틱스 0.63주의 비중으로 주식교환 하는 방식이다.
두 회사의 가치 기준을 규모나 이익 등 내재가치를 무시하고 단순히 현재 주가를 가지고 산정한 것이다.
밥캣의 주식을 들고있는 일반투자자들은 주식수의 63%에 해당하는 로보틱스 주식을 받든지 현재 주가 수준으로 현금청산하게 돼있다. 인수 과정이 끝나면 밥캣은 로보틱스의 100% 자회사가 된다.
물론 법적 절차나 내용을 어긴 사실을 없다는 게 두산 측 설명이지만 이 원장은 기본적으로 “경영진과 대주주들이 일반주주들 이익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문화적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앞서 모두발언에선 “지배주주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기업경영 사례가 반복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와 시장 참여자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규정하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비상장사인 SK E&S와 합병을 결정하면서 발행주식 수를 반영한 합병 비율을 1 대 1.2로 매겼다. 합병가액은 자산가치가 아닌 기준 시가를 토대로 정하면서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의사결정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 두 회사의 합병비율인데, 하나는 상장사이고 하나는 비상장사인 관계로 합병비율 산정에 대한 공식이 없다. 결국 삼성물산의 제일모직과의 합병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시에는 그나마 양사 모두 상장사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합병에 대한 기준점을 바탕으로 기업가치를 산정했지만, 이 경우는 SKE&S가 비상장이기 때문에 기준 자체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최태원 회장 일가의 지분이 높은 SKE&S의 지분가치를 높게 산정할 것이 예상되고, 그럴 경우 SK이노베이션 주주들 특히 일반투자자들의 합병비율에 대한 거센 반발을 잠재우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 원장은 또 밸류업 자율 공시와 관련 “산업을 이끌고 대표하는 기업들이 그 필요성에 적극 인식을 같이 하고 참여해주길 바란다”며 “대주주 차원에서 소액주주들과의 소통도 원활히 해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엔비디아, 애플 등 미국 대기업 사례를 들며 “설사 몇 년 배당이 없더라도 미배당 자원이 주주 이익으로 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이 원장은 줄곧 언급해왔던 좀비기업 퇴출을 두고는 “거래가 안 되거나 시가총액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기업의 주주들은 시장에서 빠져나갈 수단이 없다”며 “상장 제도 업사이드만 이용하고 책임은 적은 곳들을 유지시키는 게 맞는지 고민”이라고 답했다.
이 원장은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관련해선 여전히 폐지에 무게를 뒀다. 그는 “원천징수 방식으로 세금을 걷는 기술적 사안부터 배당 소득 등이 (은행)이자와 같은 성격으로 취급돼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며 “직접 투자 시엔 20% 세율을 부담하는데 펀드에 담아서 하면 사실상 50% 내외로 부담해야 하는 등 장기 투자를 저해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대체거래시스템(ATS)인 블루오션 먹통으로 주간거래 주문이 취소된 사태 관련해선 “자율적 투자 의사결정이 침해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걸 준비한 분들(증권사)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나”라며 “다만 원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중개사 등의 책임이 있다면 자율 조정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주주가치를 제고하고, 국내 증시의 밸류를 올리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두산그룹이나 SK그룹의 계열사 이동 및 합병과 관련한 소액주주들을 무시하는 결정은 기업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