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시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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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15:52 | 최종 수정 2024.11.2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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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주요 각료 인선이 갈수록 태산인듯하다. 바이든은 그 나이에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유권자들의 뜻을 반영하지 못했다. 바이든 정부의 고위직 인사도 그랬으나 트럼프의 인사도 보나 마나 뻔하다. 미국이 이 모양이니 우리나라 정치를 탓하기도 어렵다. 그런 탓인지 나는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를 떠올리고 그리워 할 때가 많다.
나의 20대는 1970년대였다. 1970년대는 혼돈의 10년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석유 파동과 무능한 카터 행정부로 이어진 1970년대였다. 미국 대학에서 첫 학기에 10.26이 발생했고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폭도들에게 점령당했다. 그리고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카터의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흑인 민권운동가 출신 앤드류 영(Andrew Young 1932~)이었다. 유엔에서 미국을 대표하기 보다는 아프리카 대표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더 어울렸던 그는 결국 사임했다. 카터는 그 후임으로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흑인 외교관을 임명했다. 카터의 정치는 매사가 그러했다. 나는 그 때 미국 민주당을 내 생각에서 지워버렸다. 레이건 대통령은 조지타운대 정치학 교수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 1926~2006)을 유엔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카터가 임명한 앤드류 영과는 격(格)이 완전히 달랐다.
198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예비선거에선 레이건이 압도적으로 1위를 했다. 하지만 나는 레이건 보다는 조지 H. W. 부시를 더 좋아했다. 레이건은 대중적 인기와 인간적 매력이 많았으나 세금을 낮추어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2차 대전 영웅이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엔주재 대사와 CIA 국장을 지낸 부시가 더 좋은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카터는 대선에서 참패했고, 레이건와 부시가 대통령과 부통령이 됐다. 나는 그 때 미국이 정상적인 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열렸다. ‘혼돈의 시대’를 끝낸 1980년대 나는 30대였다. 미국은 레이건과 부시, 영국은 마가릿 대처, 프랑스는 프랑소아 미테랑이 이끌었다. 그들은 성숙한 리더(mature leader)들이었다. 그들은 품위(Dignity)가 있었다. 폴란드 노조는 동유럽의 자유화 운동을 촉발했고, 소련에 고르바쵸프가 들어서자 세상은 급속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별안간 무너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레이건과 부시도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몰랐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레이건이 시작한 1980년대의 변화는 부시 대통령 시절에 결실을 맺었다. 부시 대통령 4년 동안은 매우 위험할 수 있는 격변하는 시기였다. 임기 초에는 베이징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동유럽은 부시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고 고르바초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시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급격한 변화가 반작용을 일으켜서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일단 동독이 무너지자 부시는 통일된 독일을 추구하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를 지지하고 통독에 미온적이었던 대처를 설득했다. 그리고 부시는 나토가 유지되어야 하고 미군이 서유럽에 주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동유럽 공산권은 민주주의 체제로 연착륙을 할 수 있었다.
부시(George H. W. Bush 1924~2018)는 자기가 레이건처럼 대중에게 영감(靈感)을 일으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시는 자기는 결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시는 아마도 열심히 일했던 대통령으로도 기록될 만하다. 부시가 대통령을 지낸 4년은 국제관계가 요동을 칠 때였다. 부시는 항상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III 1930~), 그리고 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1925~2020)와 의논했다. 세 사람은 단순히 대통령, 국무장관, 그리고 안보보좌관이 아니었다. 그들은 친구이고 동료였다. 미국 역대 안보팀에서 이 처럼 환상적인 콤비를 이룬 적이 없었다.
부시는 동유럽 공산권의 자유화를 안착시키고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부시는 자유무역 질서를 완성시킨 대통령이기도 하다. 비록 클린턴 대통령 임기에 들어서 WTO 협정과 NAFTA가 발효했으나 실질적인 협상은 부시 행정부에서 완성됐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무역협상을 이끈 사람은 칼라 힐스(Carla Hills 1934~) 무역대표(USTR)었다. 나는 미국의 여성 각료급 인사로는 진 커크패트릭과 칼라 힐스가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시는 1992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1992년 가을, 40대에 들어선 나는 이듬해 정교수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재선에 실패하는 부시 대통령을 보고서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꼈다. 부시는 냉전 후의 세계가 "보다 친절하고 젠틀할 것"(kinder and gentle)이라고 말했다. 냉전이 끝난 평시가 돌아오자 미국인들은 더 이상 부시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배해서 수상직을 물러났듯이 말이다. 그리고 30년 세월이 흘러서 변변한 리더가 없는 세상을 보면서 나는 레이건과 부시가 이끌었던 12년 세월을 되돌아보고 향수(鄕愁)에 젖곤 한다.
이상돈, 전 중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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